- 몽블랑 만년필
결혼하고 3~4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짝퉁 몽블랑 볼펜이 생겼다. 꼭대기에 몽블랑 마크만 있을 뿐, 누가 봐도 조잡하게 생겨 짝퉁이라는 표가 났었지만 나름대로 필기감이 괜찮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몽블랑은 짝퉁도 그런대로 쓰기 괜찮은가 봐.'라며 쓰곤 했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아내가 선물이라며 백화점에 가서 수십만 원짜리 몽블랑 만년필에 이름까지 새겨서 사 왔다. 내 남편이 짝퉁 펜을 쓰게 할 수는 없다면서. 지금은 그런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지만 그때는 넉넉하지 않았던 때였던지라, 비싼 만년필을 산 아내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쓰지는 못하고 가끔씩 꺼내어 보기만 했었다.
아내에게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을 그렇게 들었지만 아까워서 쓰지 못했고, 가끔 너무나 써보고 싶을 때, 예쁜 글씨를 써보고 싶을 때만 살 때부터 들어있던 잉크 카트리지를 하나씩 끼워서 썼었다. 그나마도 얼마 안 쓰고 모셔두다 보니 잉크가 다 날아가 버리곤 했었다. 그렇게 아껴두다 개원을 하고 나서 각종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나, 일기를 쓸 때, 책에 있는 인상적인 글들을 적어두고 싶을 때만 가끔씩 꺼내어 쓰곤 했다. 마치 무슨 의식을 하듯이 '이 만년필이 계약서에 있는 소중한 약속을 꼭 지키게 해 줄 거야,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 짓게 해 줄 거야, 책에 있는 글들을 마음속에도 새겨줄 거야...'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오늘 강원국 작가의 <강원국의 인생공부>를 읽다가 나태주 시인 인터뷰 편에서 본 시가 너무 예뻐서 적어두고 싶은 마음에 만년필을 꺼냈다. 너무 오랜만에 꺼낸 건지 잉크가 굳어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풀어주고 다시 잉크를 채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혹여나 저 만년필이 다칠까, 고장 나서 안 나올까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져 있었다. 다행히 만년필은 여전히 좋은 필기감으로 부드럽게 나왔고 나는 안도하며 일기장에 시를 적어둘 예정이다.(우선 이 글을 마무리해야지...)
아끼고 아끼며 사용한 몽블랑 만년필은 10년쯤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새것 같다. 그때 아내의 그 마음이 그렇게 반짝였듯이, 아내의 고마운 마음에 차마 아까워 꺼내지 못한 마음을 기억하듯이, 여전히 처음 들어있던 그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