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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빵 뿅원장 May 29. 2024

아침부터 딸에게 사자후를 날렸다.

- 좁은 내 마음부터 다스려야겠다.

(그림은 인터넷에서 구해왔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삭제하겠습니다.)




  수요일은 아내가 쉬는 날이어서 아이를 내가 학교에 데려다준다. 가는 내내 뒷좌석에 앉아서 쫑알쫑알 말을 한다. 중학생인 딸은 학급에서 반장인데 그냥 들어도 하는 일이 참 많다. 어찌 보면 자질구레한 학급일을 모두 도맡아서 하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이기에 그냥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반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단다. 그 맘 때 즈음 아이들은 다 그런 거니까 싶다만, 아이의 말을 듣다가 열이 받은 것은 이 말을 듣고 나서였다. 체육대회 응원카드섹션 때 쓸 카드를 만들겠다고 다른 아이가 제안을 했고 그 의견대로 진행하기 위해 인당 500원씩 재료비를 걷었단다. 담당하기로 한 아이가 재료를 사서 만들겠다고 해놓고 버거웠는지, 귀찮았는지 다 못할 것 같으니까 "네가 반장이니까 나머지는 좀 맡아서 해줘"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친구들 부탁을 잘 들어주는 아이이기에 거절을 못 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거절했어야 했다. 아이는 요즘 너무 바쁘다. 학교에서는 학급일, 동아리일도 많고 학원에서는 숙제도 많이 나온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여서 취미 활동까지 다 하려다 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본인도 너무 바빠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다가 못한 것까지 떠안고, 그걸 마무리하느라 잠자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줄이는 아이의 모습에 화가 났다.

 

  "네가 반장이니까"라는 말로 일을 떠넘기는 다른 아이들의 말들이, 마치 이해하고 받아주려 하면 너무나 쉽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 탓을 하는 어른들의 모습 같아서, 의사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으면서 불편하고 안 낫는다는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갑자기 화가 끓어올랐다. 아이에게 다다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바보야? 왜 그런 거 거절을 못해? 정작 너는 바빠서 쉬지도 못하고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있으면서 남이 너한테 떠넘기는 일을 왜 받아? 그리고 걔가 맡아서 하기로 한 거면 '네가 마무리 져라'라고 했어야지. 네가 무슨 남이 다 못한 일 받아서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거절하면 남들이 싫어할까 봐? 그렇게 해주면 다른 애들이 너 좋아해? 고맙다고 해? 오히려 더 쉽게 생각하니까 계속 너 혼자 하고 있는 거잖아!" 화가 나서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 안 되는 게 느껴지는데도 멈춰지지 않는다. 화난 감정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다.

  

  결국 아이는 등굣길부터 울음을 터뜨렸고, 앞으로는 거절하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안 그럴 걸 알기에 더 속이 상한다. 아이를 내려주고 나니 가슴이 무너진다. 아이는 그저 투정을 잘 들어주는 아빠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일 수 있는데 그냥 화를 터뜨려버린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터트린 것 같아 미안하고,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앞뒤 이야기를 더 들어봤어야 되었는데... 아이의 상황과 마음을 더 자세히 들어보고 살펴봤어야 했는데... 좋은 말로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한 번 참고 담임선생님과 상의할 수 있었는데... 거절하는 다른 방법을 알려줄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만 끝없이 밀려왔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머니도 편찮으시고, 이번 달도 힘겹게 지나갔고, 의지하던 직원도 퇴사하고, 내 몸도 아파서 이래저래 복잡하고 힘든 상황에 자꾸만 무너지는 것 같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카톡을 남겼지만 아직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지금 누군가의 조언이, 도움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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