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본능
두 아이를 낳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곳.
더 나은 환경을 뒤로하고, 다시 이곳으로 발길을 돌릴 줄은 미처 몰랐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소도시였지만, 사실상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너희는 우물 안 개구리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켠이 꿈틀거렸다.
‘그래, 나는 저 우물 밖을 보고 싶다.’
내가 보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도, 직장도 모두 타지로 택했고,
나는 점점 고향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비용이 드는 것 같았고,
비싼 물가에 친구와 방을 나눠 살아도 늘 낯설고 어딘가 불안했다.
그래도 마음먹었다.
‘한 번 제대로 자리 잡아보자. 서울에서 멋지게 살아보자.’
힘들어도 견뎠다.
“다들 그렇게 살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냈다.
그러다 어느덧 결혼 적령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서울에서 같은 고향 출신인 남편을 만났다.
멀고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익숙한 말씨와 정서가, 묘한 믿음으로 다가왔던 걸까.
결혼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새로운 삶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의 자아실현은 서서히 흐릿해졌다.
편안함을 줄 사람을 무의식중에 찾고 있었던걸까?
남편을 소개받고는, 이상하리만치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이면 되겠다.’
그때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자취를 오래 해서 그런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은 곧, 직장을 그만두라는 뜻이었다.
이미 지쳐 있던 나는, 그 말이 오히려 핑계가 되어버렸다.
신혼집과 직장 사이 왕복 세 시간 거리.
그 힘든 일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알겠어”라고 말하며 퇴사를 결심했다.
그 무렵 회사에서의 나의 입지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결혼을 이유로 떠나겠다 하니, 회사 입장에선 괘씸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렸다.
나이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결혼하면 남편의 덕을 보며 조금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보수적인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음 한구석에 후회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한 번쯤 끝까지 도전해봤다면 지금쯤은…’
그런 상상을 한다.
아마도 지금처럼 고향에 머무르지 않고,
더 넓은 세상에서 또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힘든 시기에 내려와, 눈물도 콧물도 흘리고,
심장이 도려지는 듯한 아픔까지 겪으며 겨우 뿌리를 내렸다.
서울에서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오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고도 가혹했다.
“거지가 되어 돌아왔단다”
시골분들은 그렇다.
서울에 살면 잘 사는 거고, 거기서 고향으로 내려오면 패배자, 망한 사람 취급을 한다.
뒷말들은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더 깊은 눈물을 삼키셨다.
지나고 나니, 그 시간은 결국 ‘잠시’였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비교적 안정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내려와 살길 잘한 것 같아.”
“지금 잘 살고 있잖아.”
“부모님도 곁에 계시니 자주 뵐 수 있고, 좋아하시잖아.”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를 다독이며
조금씩 ‘지금의 삶’에 안착해왔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자란 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던가.
나 역시, 귀소본능처럼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어 멀리 떠났고,
세상의 넓음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우물 안에 서서,
좁은 틈 사이로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오늘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에서 나만의 속도로, 평온함을 느끼며.
벌써 10년이 훌쩍 흘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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