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터진 후 남편과 나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입을 열면 화부터 났고 서로 성질내기 바빠서 이성적인 대화가 어려웠다. 사건이 경찰을 거쳐 검찰로,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나는 수시로 응급실에 가야 했고 한 움큼씩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억울함보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은 무력감이 지배적이었다.
그즈음 지방에 사는 큰딸이 아기를 낳았다. 산구완이라는 명목은 하늘에서 내려온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남편 앞으로 위임장을 쓴 후 지옥을 탈출하듯 현실을 빠져나왔다.
갓난쟁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시름은 남의 일이었다. 송사가 진행 중인 현실이 때 없이 떠올랐지만 배짱이 두둑해졌다. 품에 안고 있는 아기가 세상의 전부인 듯 입꼬리가 올라가는 판에 그따위야 뭐, 싶었다. 여린 것이 품고 있는 에너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태풍의 눈처럼 위태로운 평온이었으나 그 덕에 약도 없이 숙면에 들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여행을 제안했다. 우리는 여전히 불통이었고 막힌 물꼬를 뚫는 계기가 절실하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어색하게 안부를 주고받은 후 입을 닫았다. 송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지만, 섣불리 묻기가 두려웠다.
해가 기울고서야 여행지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진입하는데 어둑발이 성큼 다가오더니 이내 경계가 스러진다. 낯선 숙소에 들어서니 물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반겨준다. 나는 여유로워진 마음을 숨기며 남편을 훔쳐본다. 그는 여전히 묵언 수행 중, 겉옷을 벗어 반쯤 드러난 살집 없는 등은 단단한 벽이다. 입을 다무니 귀가 더욱 크게 열리는지 천지에 물소리가 넘쳐 선 자리가 둥둥 떠내려갈 것 같다. 폭포 아래 선 소리꾼처럼 목이 터지도록 ‘말’을 토해내고 싶었다.
남편은 간단한 술상 앞에 앉으며 자신의 말이 끝나기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말 것을 명했다. 나도 그러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몇 차례 재판 끝에 합의로 끝냈다며 이젠 잊어버리라고 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땐 고맙고 든든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대출은 받았지만 변두리로 이사 가면 충분하다고 나름 해결책을 제시했다. 말끝마다 마누라의 건강을 걱정했기에 눈물이 핑 돌던 감동이, 집을 팔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이사는 하고 싶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휴양림으로 오는 중에 보았던 꺼멓게 타버린 산불 현장이 떠올랐다. 숲이 하루아침에 민둥산으로 변해버린 처참한 모습, 내 꼴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거푸 마시며 횡설수설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쨌거나 실상을 알고 해결 방법까지 인지했으니 마음이 편했을까. 푹 자고 일찍 눈 뜬 나는 곤히 자는 남편이 깰까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쪽 하늘 가득 먹구름이 돌개바람처럼 휘돌고, 아침노을은 겹겹의 어둠을 밀어내느라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금방 떠오를 것 같은 해는, 그러나 좀체 먹구름을 뚫지 못했다. 내 잘못은 없기에(?) 금방 해결될 줄 알았던 사건은 좀체 끝나지 않더니 결국 먹구름에 잠식당한 꼴인가. 지쳐 보이는 노을이 내 모습 같아 시선을 거두었다.
숲속으로 이어진 정갈한 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툭툭, 열매가 떨어지듯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싶더니 금세 퍼붓듯 쏟아졌다. 풀이 젖고 땅이 젖고 나도 흠뻑 젖었다. 순식간이었다. 예기치 못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자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시원했다. 온몸에 묻어 있던 오물이 씻겨나가나 싶더니 발바닥에서 뿌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일깨우는 제각각의 향과 소리와 몸짓이 어우러진 숲에서 나는 한 그루 나무처럼 서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내 이름을 내건 사무실에서 종업원을 빙자한 동업자가 고의적인 금전 사고를 내고 구속되는 일이 터졌다. 뉴스에서나 보던 사건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사기 전과가 수두룩했다. 계약금 선에서 일이 불거진 건 불행 중 큰 다행이었다.
바람이 몰아치니 활엽수가 온몸을 흔들어댔다. 마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춘기 아이가 제풀에 펄펄 뛰는 듯하다. 같은 위치에 있건만 침엽수는 침착하다. 바람길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일 뿐, 의연하다. 내가 활엽수라면 남편은 침엽수일까.
울울창창한 휴양림의 저 침엽수처럼 마르고 키가 큰 남편은 뾰족한 외양 그대로 속이 좁다. 성실함은 인정받는 건강한 사회구성원이지만 너무 깐깐해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반면 감정이 헤픈 나는 작은 바람에도 내키는 대로 펄럭인다. 더펄더펄 실수도 잦고 어린아이처럼 변명도 길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비바람 치는 숲은 만감을 교차하게 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마누라는 종로에서 뺨 맞고 애먼 남편에게 화풀이해대고 있다. 이것이 내 현주소였다.
쏟아지던 비는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비바람에 긴장했던 숲이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제풀에 펄펄 뛰던 활엽수도, 품위를 지키려 안간힘 쓰던 침엽수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붙박인 듯 서서 침엽수를 바라본다. 거기에 감정을 절제하려 애쓰는 남편이 보인다. 셔츠 깃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새 옷을 밀어내는 사람인데 적지 않은 돈을 허망하게 내다버려야 했으니, 그러고도 저 잘났다 뻗대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하니 그 속이 어떨까.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내 안에 무질서하게 돋아난 잡풀들을 쓰러뜨렸다.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소심함이 남편의 단점이라면 경솔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은 큰 장점이다. 한 걸음씩 내딛는 우직함이 답답해서 비난도 서슴치 않았던 나, 과소평가했던 성실함이 산처럼 높아 보인다. 보다 성숙한 동반자가 되라고, 비바람이 후려치며 일러주었다.
그래, 이사하자. 길이 끝난 곳에서 또 길이 시작된다고 했다. 불타버린 처참한 산에도 세월이 지나면 풀도 자라고 나무도 자랄 것이다. 재가 거름이 되어 더 비옥한 숲이 될 수도 있으리라.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젖은 숲에 먹구름을 밀어낸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