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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비콩 Feb 02. 2024

1•그때는 '학폭위'가 없었어요

시골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

 작은 시골학교였다. 전교생이 100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 학교. 어린 시절부터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며 부모님까지 다 알고 지내는, 한마디로 소꿉친구들이 가득한 학교였다.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학교는 어쩐지 사람냄새가 나고 정이 가득할 거라고 믿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왕따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의 학급만 있기 때문에 매년 똑같은 친구들과 한 반이 되고, 친구의 언니 혹은 동생이 다 내 가족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친하고 가까웠던 사이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따돌림은 내 삶에 큰 재앙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질풍노도의 시기, 작고 소중한 우리 학교는 단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 그들만의 학교가 되어버렸다.


 여학생들만 아는 은근한 머리싸움이 있다. 홀수로 몰려다닐 때 느끼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 수학여행을 가거나 이동 수업으로 두 명씩 짝이 되어야 할 때, '누가 혼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짧은 시간에 눈치게임을 한다. 무리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 '내가 혼자 앉을게. 너희끼리 앉아.' 착한 척을 하거나 이런 말을 다른 누군가 해주길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다 이런 눈치게임에 진절머리가 나게 되면, 누군가의 주도 하에 한 명을 떨구는 작업이 시작된다.


 내가 같이 다니던 무리는 총 7명으로, 다같이 움직이기엔 조금 많은 인원수였다. 그럼에도 우린 '러키세븐, 힘들 때 도움을 주는 sos'라는 명칭까지 붙여가며 함께했다. 그렇게 평생 좋은 친구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중2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되는 개학날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도 날 반기는 친구가 없었다. 말을 걸어도 얼떨떨한 미소로 답하는 친구들을 보며 본능적으로 알았다. '뭔가 다르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런 애매한 상태로 며칠이 흐르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나는 한 명의 친구에게 물었다. 대답은 심플했다. '그냥 네가 싫어. 우리 다 같은 마음이야.' 당황스러움과 속상함에 태어나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이후 다른 무리 친구들과 같이 지내려고 했지만, 거짓된 소문이 돌았고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거짓말이다. 나를 믿어달라'는 말은 허공에 흩날렸고, 나는 나의 잘못도 모른 채 나쁜 애가 되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나였는데, 학교에서 매 순간 혼자인 것은 사춘기인 나에게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급식실도 작아 선생님은 물론, 전교생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었다. 선배, 후배 모두 나의 혼밥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덜 친했던 남학생들 보기에도 수치심이 들었다. 당시에는 지금이라도 친구들이 몰래카메라였다고, 같이 놀자고 말해주기를 자존심도 없이 간절하게 바랐다.


 차라리 계속 투명인간 취급을 해주면 좋았을 것을... 곧 약자가 된 나를 향한 일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손짓으로 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놀거나 정신병원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눈빛이 재수 없다, 쌍욕 등 언어폭력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다. 내가 입은 옷이나 신발로 별명을 만들고,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읽었다. 나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오히려 선생님께는 내가 학칙을 어겼다며 벌점을 주라고 단체로 항의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하루동안 겪었던 일들을 곱씹는 밤과 학교에 가기 위해 눈뜨는 아침 모든 날이 괴로웠다. 속상해하시는 부모님을 보기도 힘들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으시는 선생님들도 원망스러웠다. 하굣길 논두렁에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내가 죽으면 걔네들도 후회할까? 끝까지 날 욕할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이지만 죽을 생각까지 한 나는 내 자신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소리 내 울었다.

 마음을 바꿔 먹었다. 집에서 혼자 울더라도 학교에서만큼은 절대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리라. 혼자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기죽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가 주눅 들고 힘들어하는 걸 너희들이 바라는 거 다 아니까... 쉽진 않았지만 쉬는 시간엔 음악을 들으며 날 보호하고 오늘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왕따지만 반에서 1, 2등을 계속 유지했으며, 반박하고 싶지만 차마 뱉지 못하고 입 속에서만 맴돌던 말들을 연습장에 써 내려가며 그렇게 한 학기를 버텼다.


 그때는 지금처럼 학교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는지 사실상 '학폭위'가 없었다. 나를 괴롭힌 무리와 나를 떨군 무리를 모두 합치면 하나의 학급이 되었다. 아마도 한 학급밖에 없는 시골학교에서는, 반 전체 학생들이 징계받고 전학 가는 것보다 나 한 명이 전학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소리소문 없이 전학을 갔다.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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