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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May 20. 2024

인간 된 삶에 대하여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날이 갈수록 기술이 발전해 세계는 근대화되고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은 없어진다. 합리와 효율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필요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기술을 개발하고 건물을 쌓아 올린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덕성은 뒤로 밀려나기 마련인데, 지금 당장 주변을 바라보면 친밀한 이웃들과의 관계를 느낀 지 오래며, 나눔이라는 미덕을 몸소 실천한 게 언제인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즉 시작할 때 언급한 “인간이 없어진다.”는 표현은 기술이 발전하고 근현대적 생활방식이 제도화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리 호이나키는 이러한 기술문명사회에 의문을 표하며 정의를 위한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미국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다시 말해 노후까지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그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항의의 표시로 베네수엘라로 망명하는 과정부터 시작한 이야기의 묶음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리 호이나키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껴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는데, 그는 베네수엘라의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인간다운 삶,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온기를 몸소 체험하며 ‘흙’이라는 표현을 통해 근대문명사회를 비판하고 농업과 공동체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흙이란, 테크놀로지의 편리함에 기대지 않고 다 함께 농사를 지으며 빈곤한 삶을 영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미다. 우리 인간들은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흙을 밟고 있어야 하며,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흙의 본질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근대문명은 흙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계속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건물을 높이 세우며 편리, 효율, 합리라는 말로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만, 결국의 목표는 영생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은 죽어야 한다. 때가 되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구축하지 못한 영혼들이 넘쳐나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리 호이나키는 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실제로 근대문명이 들어오고부터 세상은 변했다. 과거,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농사를 짓던 시절엔 이웃과의 왕래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노화나 병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돌봄과 보살핌은 철저히 제도, 자본화되어 서비스된다. 오래전 인간이 당연히 해왔던 것을 제도적으로 규정해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인간에게 선심 쓰듯 베푼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부터 인간이 당연히 해왔던 것을 철저히 자본화시킨 사회는 인간을 날 때부터 소비주체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렇게 소비주체가 되어 길러진 인간들은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며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단편적인 예시를 들었으나, 실제로 근대문명이 들어오고부터 인간은 소비주체로 길러지기 시작했으며 원초적인 덕성조차도 잊은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영혼이 죽은 채 기술을 개발시키며 영생을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장에 필자가 인상 깊게 본 구절이 있다. 다름 아닌 자동문에 관한 것인데, 사라진 인간성을 자동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동문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 전 사람들은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거나 휠체어나 목발 등으로 인해 문을 사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려는, -그러나 이것을 따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문을 열어주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편리화 효율을 추구하기 전의 사회는 속된 말로 낭만이 있었다.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인간적인 면모를 고작 문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러기 힘들다. 자동문이 들어오고부터 사람들은 편리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문을 잡아줄 필요 없이 본인만 편하면 되는 세상이 와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근대문명과 거대기술에서 탈피해 인간다운 삶을 사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책 속의 리 호이나키는 시, 언어, 농사를 강조했는데, 여기에 필자의 관점도 함께 이야기해보려 한다. 시의 경우 그것이 주는 특별한 생태적 감수성이 있는데, 시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인간상의 모습을 언어로써 표현한다. 리 호이나키는 이것을 보고 “시인은 신의 언어를 번역하는 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태적인 감수성을 드러내는 언어를 신만큼 드높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언어를 독서, 소통과 연관 지어보면, 독서는 타인의 생각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오래된 대화수단이다. ‘독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타인과의 대화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라는 구절로 보았을 때 리 호이나키 역시 읽고, 쓰고, 말하는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비판적으로 거대기술문명을 비판하고 부정하기보다는 시, 언어를 통한 건강한 의사표현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리 호이나키의 메시지라고 짐작해 본다. 농사의 경우 인간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상기시킨다. 농사야 말로 생태, 공동체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가장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기술문명의 제도화된 시스템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전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노화가 찾아와 뜻하지 않게 일을 멈추게 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근대문명 전부터 살아온 이들은 근대문명(병원 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데,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다. 제도화된 문명이 주는 편리함에 잠식되어 문명에게 다뤄지게 되면 다시 빠져나오기 힘들 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평생토록 구축한 인생의 습관,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트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필자가 설명한 제도화된 돌봄, 보살핌 같은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유 없는 제도화’ 오늘날 인간의 덕성을 서비스하는 기관을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특히 병원과 같은 의료기관 같은 경우,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환자를 망쳐놓는다. 리 호이나키는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과 관련된 병원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버지는 급격히 몸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병아리에게 먹이를 주는 게 하루의 일과였던 그의 아버지는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게 되는 다시 말해 무기력한 생활을 반복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의 얘기로 넘어가 보면, 필자는 암에 걸린 두 친구가 병원과 농촌으로의 귀향이라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부터 기술문명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간 친구는 수술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 다시 말해 병원의 의료시스템에 의해 몸이 야위고 자신의 뜻대로 앞으로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하이테크 의학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손길(병원의 조치)이 필요한 이유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친구는 의학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택했다. 그러자 그에게는 앞으로의 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의학체제의 바깥에 서서 병원에 누워 신세를 지는 생활을 하며 삶을 끝내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물론 이것만으로 의료시스템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리 호이나키의 표현을 빌리면 어차피 둘의 끝은 죽음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의료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긴 채 앞으로의 삶조차 본인이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딘가 잘못된 게 맞을 것이다. 노인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들은 죽음으로써 얻는 안식의 평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병원에 있기를 한사코 거부하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님을 더 오래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제도화된 시스템의 정점인 병원의 입원실에 ‘쑤셔’ 넣는다. 병원은 그들이 가진 하이테크로 환자들의 수명을 늘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게 되었다. 이러한 의료시스템은 노인들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삶의 방식을 모조리 깨트린다. 이들은 안식의 평온함도 알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입원실)에서 목숨을 연명할 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오래 살거나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것을 옳다고 여겨도 되는가이다. 진정으로 이들을 위한다면, 이들에게 삶의 결정권을 주고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 죽게 놔두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아가다 평온히 끝을 맞이하는 거란 얘기다. 노인들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당장에 나이가 어린 환자 역시도 자신의 삶을 하이테크에만 맡겨놓고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하이테크가 자신에게 필요한 이유를 계속 되뇌면서 병원에서 목숨을 연명하다 삶을 끝내는 건 마찬가지니 말이다. 돌봄, 보살핌의 대상인 이들은 이것을 바라고 있는가? 인간은 위선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위하는 척, 신경 쓰는 척을 하며 삶의 결정권조차 앗아가 버린다. 우리는 위선적으로 다른 이의 삶을 앗아가고 정형화하는지도 모르겠다.


리 호이나키의 가치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확신이 있고 힘이 있다. 다른 이와 함께하는 삶을 지향하고 기술문명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한 행동들을 직접 실천해 낸다. 그가 멕시코로 향하는 여정을 떠날 때 필자 역시 깊은 생각을 하게 됐는데, 리 호이나키는 멕시코로 갈 때 비행기가 편하고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행기를 “뜰 때마다 새로운 것을 죽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필자는 여기서 비행기는 부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를 타는 이들은 근대적 기술문명에 영향을 받은 삶을 살고 있으며 편리와 효율성에만 중점을 두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편리와 효율을 추구하는 이들의 자본은 넉넉할 수밖에. 반면 호이나키가 택한,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근대적 생활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서로 부대껴 사는 데 익숙해져 있다. 여기에 더해 효율과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이게 당연하다. 호이나키 역시 매 비행마다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며 새로운 것을 죽이는 비행기가 아닌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 버스를 이용했다. 멕시코로 떠나는 여정이 담긴 글에서 호이나키의 가치관을 비롯한 인간적 면모가 보였다.


글을 통해 전해지는 정의를 향한 리 호이나키의 가치관은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제목과 참 어울린다. 근현대적 기술문명과 더불어 제도화된 기관들의 사악함을 눈치챈 그가 농장과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덕성의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효율과 편리함 아래 가려진 거대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효율성과 편리함을 포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리 호이나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근현대적 문명이 인간 된 삶을 망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이러한 체제를 바꾸려면 농촌과 공동체가 회복되어 함께 살아간다는 중요한 가치를 알려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데 바쳤다. 리 호이나키가 걸어간 길은 비틀거리며 걸을 만큼 험난한 길일지라도 틀린 길이 아니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인간 된 삶을 위한 길이었다. 거대한 기술문명이 영생이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 된 삶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비틀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 그러나 주위에 사람이 모이면 비틀거리며 걷지 않을 수 있다. 그들과 함께 뜻을 나누고 어깨를 내어준다면 인간 된 삶을 살기 위해 비틀거리지 않아도 된다. 리 호이나키는 필자에게 시, 언어, 농사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며 정의를 향한 걸음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리 호이나키는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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