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권력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by 박민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난 감시권력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제러미 벤담(이하 벤담)은 ‘모두’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친 ‘파놉티콘’이라는 원형감옥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는 중앙의 원형 공간에 감시탑을 세우고 감시탑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배치하였으며, 중앙의 감시탑은 어둡게 하고, 죄수들의 방은 밝게 빛나게 해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들의 시선을 죄수들이 알 수 없게 하는 구조다. 결국 ‘파놉티콘’은 죄수들 자신이 상시로 감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감시를 순응하는 시스템이며,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원을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특성인 저비용, 고효율과 궤를 같이 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벤담은 ‘파놉티콘’이 교도소를 넘어 기숙형 학교, 정신병동 등 통제가 필요한 곳에서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벤담의 ‘파놉티콘’은 밀로스 포먼이 연출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맞닿아 우리의 생각을 헤집어 놓는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증상만으로 인간을 획일화•진단하는 제도 안에 들어간 정신병동 환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 맥머피는 교도소에서 노역하는 것보다 정신병동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낫다고 생각해 정신질환을 가장하여 정신병동 안에 들어오지만, 정신병동에 들어와 보니 수간호사 레치드의 감시 아래 정신병동의 환자들 모두가 획일화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맥머피의 시선을 바탕으로 레치드 간호사의 형태를 띤 감시권력이 인간의 참다운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참다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환자들의 삶은 레치드 간호사라는 권력주체로 인해 제도화 된 병원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잠을 자고, 운동 시간을 가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왜인지 모를 역겨움에서 파생된 불쾌감이 든다.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병원의 시스템만을 따르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드는 답답하고 착잡한 감정을 맥머피가 우리 대신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나타내고, 저항하지만, 스스로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 한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그의 목소리가 낯선 언어일 수밖에 없다.


맥머피는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인간성을 시험하려는 듯 여러 일탈(정신병동의 입장에서)을 저지른다. 몰래 버스를 훔쳐 나들이를 가거나, 월드시리즈 시청권을 주장하고, 급기야는 콜걸을 불러 병동 안에서 파티를 벌이는 등 정신병동,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도 낯선 방식으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맥머피의 행동은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나, 레치드 간호사의 형태를 띤 감시권력을 영화에서 비판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맥머피의 행동은 인간 된 삶을 향한 투쟁으로 바라봐야 할 듯하다.


밀로스 포먼은 맥머피의 몸을 빌려 스크린 밖의 이들에게 “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사람을 증상만으로 획일화하여 낙인찍고 격리시키는 정신병동의 시스템과, 자본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성공하는 삶만이 좋은 삶이며 그것에 반하는 이를 이상하다는 말로 낙인찍고 격리시키는 사회의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영화 막바지, 맥머피는 정신병동을 탈출하기 전, 콜걸을 불러 정신병동 안의 환자들과 파티를 벌인다. 파티를 마치고 분위기가 고조되어 갈 때쯤 맥머피는 콜걸과 함께 빠져나가려 하지만, 젊은 환자인 빌리가 콜걸에게 관심을 보이자 둘이 잠자리를 갖게 하고 그만 잠에 들고 만다. 날이 밝고 레치드 간호사를 비롯한 정신병동 직원들은 지난밤의 흔적을 목격하고 환자들을 소집하지만, 빌리만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빌리는 콜걸과 잠자리를 가진 사실을 레치드 간호사에게 들켜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때, 레치드 간호사는 빌리가 죽었는데도 불구, 다시 병원의 하루 일과를 시작하자고 이야기하며 제도화 된 시스템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기계’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이에 맥머피는 그의 목을 조르며 저항하지만, 경호원들에 못 이겨 제압당하고 만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추장의 시선을 통해 나타난 맥머피는 전두엽이 제거당한 채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고, 정신병동의 숨 막히는 제도와, 감시•통제 시스템에 저항하고자 했던 인간 맥머피는 추장에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잔잔하지만, 광적인 흐름으로 진행되던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더 요동치는 흐름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우리에게 영화를 즐기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흐름 속에서의 사유를 요구한다. 제도화 된 정신병동의 규율에 저항하고자 했던 맥머피의 좌절, 그리고 추장의 탈출은 우리에게 있어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지듯,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며, 그 위를 날아간 새는 ‘이상(理想)’이라고 해석하는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았을 때, 추장의 탈출은 결국 인간 된 삶이라는 ‘이상’을 품었던 새인 맥머피의 뜻을 이어 사회의 통념에 얽매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정리하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거대 감시권력에 순응하는 민중을 정신병동 환자들에 빗대어 나타내는 영화다. 즉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영화의 문제의식은 국가라는 거대한 원형감옥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 스스로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난 감시권력의 주체는 레치드 간호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권력의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정신병동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치, 자립과 같은 인간의 기초적 삶의 틀을 망각한 채 그저 감시에 순응하여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난 인간성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난 인간성은 너무나 명확하다. 감시•통제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저항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정신병동 환자들은 직관적으로 보았을 땐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지만, 이러한 광기를 잘못되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이성적이고 냉소적인 게 미덕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격리시켜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들은 미친 것인가?’, ‘그들의 광기는 과연 질병인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을 토대로 사회의 통념은 정상적인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을 텐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친절하게도 광기로 비춰지는 맥머피의 ‘저항’을 통해 앞에서 말한 쟁점들을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각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은 ‘파놉티콘’의 형태로 우리들에게 찾아와 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세계의 통념에 존속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맥머피의 모습은 현 시대의 인식으로 보았을 땐 그저 ‘미친놈’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것이 곧 최선이고 더 낫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를 미쳤다고 규정짓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통제하기 전에, 광기 앞에서 우리의 이성을 설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에서는 이상이 없는 정상인으로 살아온 맥머피가 정신병동에 들어오고 그의 모든 행동이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것만 봐도 그러지 않는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 맥머피의 행동은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누군가는 미친 사람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맥머피가 정신병동에 저항하고자 했던 행동은 결국 더 나은 삶을 향한 발걸음이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된 그에게는 인간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병동 속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 채 환자들을 조직해 일탈행위를 저지르는 그의 모습은 멀리 돌아와 ‘연대’라는 단어로 우리에게 닿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맥머피의 행동이 다소 급진적으로 나타나기는 해도, 그것이 아래에서부터 뭉쳐 저항하고 연대하는 민주주의와 같은 결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자신만의 언어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즉, 인간성의 핵심은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며, 타인과 연대하여 같이 발걸음을 내딛는 데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추장이 맥머피를 죽이고 정신병동을 탈출하는 장면은 전두엽이 제거당한 채 함께 탈출할 수 없게 된, 그러니까 사유를 통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맥머피에게 일종의 연민을 베풀어준 것이라 봐야 한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어도, 자신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영화를 보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인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이성이 곧 인간을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환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레치드 간호사는 이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며, 맥머피는 감정이 앞서며 저항하는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둘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밀로스 포먼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는 이성으로 점철된, 감시와 통제라는 숨 막히는 비인간적 시스템이며, 이성이 감정을 ‘미친 것’, ‘극복해야 할 것’으로 진단하는 순간 그 간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는 인간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상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과 손을 맞잡고 연대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난 권력구조

영화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주체는 단연코 레치드 간호사다. 그녀는 정신병동의 시스템 속에 환자들을 예속시키며 환자들의 주체적 삶을 통제한다. 맥머피 역시 그것을 알아차리고 권력의 주체에게 계속해서 저항하지만, 또 다른 환자 체스윅이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동의 수술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병원이라는 곳 전체가 철저한 감시•통제로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걸 발견한 맥머피는 문득 레치드 간호사만이 정신병동의 환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치드를 포함한 정신병동을 관리하는 모든 이들이 제도 아래서 환자들을 철저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있음을 말이다.


권력의 주체가 명확한 1차원적 권력으로만 일컬어지는 영화 초반, 토의 시간에서 본질적인 걸 묻지도, 요구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2차원적 권력을 토대로 구성된 중반, 마지막으로 ‘파놉티콘’ 개념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감시•통제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3차원적 권력이 영화 속에서 순서대로 나타난다. 결국 영화에서 나타난 권력구조의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에서 나타난 권력구조를 현대로 불러와야 할 필요가 있을 텐데, 현대의 권력구조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그 형태를 강화해 급기야는 개인이 권력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다. 현대의 권력은 아주 미세하게 개개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한다. 그 방법이 바로 규율과 제도이며, 우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통해 제도화 된 시스템에서 파생된 규율이 개인을 어떻게 복종시키는지 보아오지 않았는가. 정신병동 속 환자들이 규율에 순응하여 살아가듯 우리도 사회체제 안에서 권력의 시녀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인 학교를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학교의 규율에 따라 우리는 태도, 복장을 규정 당하며, 각자의 생활이 기록되고 관리된다. 이것이 계속되면 우리는 저항할 기미조차 보이지 못하고 권력에 복종하게 돼 결국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화 속 환자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착잡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맥머피는 레치드 간호사가 권력의 주체인 줄 알고 있었고, 그에게 불복종하며 저항하지만, 레치드 간호사의 뒤에 존재하는 정신병동의 시스템, 즉 3차원적 절대 권력에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는 곧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도 통용되는데, 멕머피의 삶을 개인의 힘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고, 다른 이들과 함께 저항하고 연대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채 더 나은 삶을 향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마을로 존재하는 민주주의

우리는 맥머피의 삶을 통해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권력에 저항하고, 자주적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맥머피의 인간성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아름다웠으나, 그는 외로웠다. 물론 추장이라는 존재가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긴 했어도 함께 삶을 나누고 저항하려는 이들은 턱없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초연결 되었지만, 파편화 된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연대를 추구하기는커녕, 권력에 잠식당한 채 정신병동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하고 있지 않은가.


감시권력이 우리와 같은 민중을 감시•통제하는 시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토대로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잠시 영화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본질과, 그것이 어떻게 체제를 변화시켜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숙고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민중이 권력을 가지고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 현대의 ‘파놉티콘’ 체제에 예속된 인간들은 투표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대의제는 그 특성상 앨리트만이 당선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이는 곧 민중들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는 다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C.더글러스 러미스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마을에서 완성된다.”(C.더글러스 러미스, 2024)고 이야기한다. 그가 말한 마을의 본질은 공동체이며, 물리적인 마을만이 마을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마을에서 나고 자라는 관계가 무너졌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직 마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맥머피가 투쟁한 것처럼, 우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교류하고, 정신적 유대를 다지며 무언가를 도모해야 한다. 이 과정과 관계는 자신의 사익만을 부풀리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을 통해 무언가를 지향하고, 마음을 나누며, 소중한 관계를 놓지 않는 게 마을의 본질, 즉 민주주의인 것이다.


특히 ‘파놉티콘’과 같이 내면화 된 감시를 통해 개인의 삶을 감시•통제하는 사회에서는 마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체제 전환을 위한 유일한 길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우리가 수많은 마을로 존재하여 한 곳으로 중앙 집중, 즉 제도화 된 시스템에 잡아먹히고 있지 않다면 기득권층은 그 많은 마을을 어떻게 일일이 상대하겠는가?


현대에는 마을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통해 제도화 된 감시권력이 민중이 자치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내면에 감시체제를 형성하게 하는 추악한 진상을 보았다. 감시권력이 우리에게 ‘미쳤’다고 규정한 것이 어쩌면 진정한 인간 된 삶이 아닐지 고민하여 서로의 삶을 넘나드는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일 것이다.


마을공동체, 민주주의 같은 대안이 터무니없는 이상처럼 보일지라도, 이상을 품고 있으면 그걸로 됐다. 감시권력의 농간에서 벗어나 인간 된 삶을 찾아 연대하고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상은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빛이 되어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테니 말이다.

참고문헌

밀로스 포먼. 1975.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C.더글러스 러미스, 이승렬, 하승우 옮김, 『레디컬 데모크라시』, 한티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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