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어 사랑을 말한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 조한진희 외

by 박민찬

사랑이 없는 세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서 조세희 작가는 지섭의 입을 빌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1970년대에 나온 소설의 이야기가 어쩐지 낯설지 만은 않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아무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르고, 각자도생하려는 사회가 아닌가. 언제부터였는지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자본논리가 우리 삶에 들어오고부터일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끝없이 팽창하려 하는 자본주의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고, 인간 사회의 공동체를 붕괴시키며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와 사랑의 상실을 낳았다.


하기야, 자본논리로 점철된 사회 속, 이미 회색으로 변해버린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대, 우정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유토피아를 그리는 이상주의자로 비추어질 게 뻔하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유토피아가 아닌 희망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비록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더라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 속에서 사랑을 찾아 인간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배움의 공동체를 찾아 함께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한진희와 10명의 저자들이 집필한 『돌봄이 돌보는 세계』에서 말하는 ‘돌봄’이라는 가치에 주목해야 했고, 각자 다른 언어로 가치와 희망을 말하는 모습을 텍스트 너머로 지켜보며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필자 개인적으로는 ‘돌봄’이라는 단어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실제 필자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서비스화 된 돌봄에 원초적인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저자들 역시 본연의 돌봄과 자본화 된 돌봄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장면들을 여럿 읽어낼 수 있었고, 그들의 언어와 필자의 언어가 조금 다를지언정,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새로이 배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과 필자 모두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건 서로간의 사랑이라고 말하며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돌봄, 그리고 자본논리

책에서 이야기한 부분과 필자의 언어를 토대로 구성한 돌봄은 인간이 스스로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타인과 연결을 통해 자신의 취약함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다. 즉 돌봄은 그 자체로 인간을 사랑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박애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산업문명이 강조하는 ‘효율’과 ‘합리’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함께 걸어가고 연대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이 모여 만들어낸 일종의 덕성이라고 볼 수 있다. 크로프트킨이 일찍이 설파하였듯 만물은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로를 챙기고 보살피며 함께 걸어 나가는데, 이처럼 돌봄과 인간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돌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뜻을 담고 있어도 그것이 자본과 결합하면 의미는 180도 달라진다. 비단 돌봄 뿐 아니라 다른 덕성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튼 필자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 ‘돌봄’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돌봄과 자본이 결합해 돌봄이 서비스화 되어 오염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이반 일리치와 리 호이나키, 김종철과 같은 사상가들은 저서나 대담을 통해 서구의 산업문명이 인간의 삶에 스며듦으로써 인간이 지녀야 할 덕성과 가치들이 유린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는데, 이 사상가들의 언어를 접하지 않더라도 돌봄과 서비스가 결합된 것의 의미는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돌봄이라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행위이자 가치에 자본논리가 개입해 서비스화 되면 그 안에 사람은 없어지고 오직 자본만 남는다. 즉 돌봄이라는 행위가 자본에 의한 것이 되고, 자본에 의해 돌봄 ‘서비스’가 행해지는 순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본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자본 내지는 자원으로 보는 사회의 현실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 한 장면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1970년 11월 13일 어느 청년 노동자가 불길에 휩싸인 채 외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의 우리에게 닿는다. 그는 인간을 착취하고 그것을 통해 이윤을 불리는 자본가들을 비판하였고, 지금의 우리는 돌봄이라는 인간의 덕성을 타락시킨 자본논리를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전태일 열사의 외침과 우리의 목소리는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즉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연 및 공동체 파괴는 인간 소외를 낳았으며, 돈이 인간보다 더욱 중요시 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성장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연을 개발 대상으로 보며 파괴하고 착취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어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안숙영은 끝없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과 여성, 식민지에 대한 착취 없이는 유지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며 마리아 미즈의 말을 빌리며 이야기했는데, 김현미가 뒤에서 모든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는 돌봄을 주고받는 존재로, 돌봄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과 이어진다.


다시 말해 돌봄이 돌봄 자체로 존재했던 시대는 산업화 이전, 자연 속에서 작은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상이었고, 이때는 그 누구도 돌봄을 서비스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자본주의경쟁체제가 심화됨으로써 자연, 여성, 식민지에 대한 착취가 답습되고, 인간과 그 외 모든 것을 자본으로 보는 시대상에서는 돌봄이 서비스화 되어 그 본질이 오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자본의 개입 없이도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다가가고, 함께 부축하여 걸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본이 만들어낸 경쟁사회 속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내치는 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된다. 인간성이 사라지고 기계만이 남은 세상, 사랑과 연대에서 비롯되는 돌봄은 죽었다. 어쩌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조차 공허한 외침일지도 모르겠다.



돌봄 서비스화의 핵심, 의료체계

이반 일리치는 “병원은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고 낳게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현대의 의료는 자본, 그리고 거대기술과 결탁하여 거대한 폭력을 만들어냈다는 필자의 말은 그다지 허황된 게 아닐 것이다. 김창엽이 근대 이후 병원이나 의료 전문직은 과학과 기술 지향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체계는 기술과 결합하여 끝없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언뜻 기술이 발전해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고, 모두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시대가 머지않은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뒤에는 의료기술의 추악한 본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결국 이것 역시도 산업문명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문명에서 비롯된 기술이 자본을 등에 업으며 거대기술이 되었고, 그것이 의료와 합쳐져 결국 영생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만에 하나, 영생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고 해도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의 취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연대하며 살아가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덕성과 가치를 망각한 채 거만하게 기술의 발전을 찬양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너무나 답답하다. 마치 배가 암초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배의 부품을 뜯어 자신의 방을 넓히는 이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자연의 섭리와 원초적 덕성과 연민을 배제한 채 오직 홀로 먹고 살겠다는 욕망은 산업문명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자연이라는 어머니에게 기댈 곳이 없어진 인간의 불안함에서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돌아와, 의료는 사람을 살리고 건강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자본과 기술이 의료에 들어온 순간, 의료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닌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로 그 가치가 귀결된다. 의료 역시 인간을 자원으로 보게 된 지금, 현대 의료체계 안에는 제도화 된 양식만 존재하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현대의 의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거부한다. 오직 증상과 병명으로만 환자를 사람을 규정한다. 의료는 본래 돌봄과 맞닿아 있는 귀중한 행위였음에도 이 역시 자본논리에 의해 침해되고 변질된 것이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리 호이나키는 저서 『正意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암에 걸린 두 친구의 이야기를 꺼낸다. A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B는 농촌으로의 귀향을 택했다. 이때 치료를 택한 A는 수술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 다시 말해 병원의 의료시스템에 의해 몸이 야위고 앞으로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하이테크 의학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손길(병원의 조치)이 필요한 이유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농촌으로 귀향한 B에게는 앞으로의 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의학체제의 바깥에 서서 병원에 누워 신세를 지는 생활을 하며 삶을 끝내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물론 둘의 끝은 죽음일 것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의료체계가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동시에 그동안 살아온 삶의 양식을 증상과 병명으로 규정하며 체제 안에 쑤셔 넣으려고 하는 기이함을 찾아볼 수 있는 예시다. 의료와 자본, 거대기술이 합심해 인간성을 앗아가는 시대, 우리는 자본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육을 위시한 경쟁논리

김누리 교수는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교육다운 교육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교육이 존엄한 인간, 개성 있는 자유인,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일이라면 대한민국은 교육은 해본 적이 없는 나라라는 얘깁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해 살을 붙여보면, 우리나라는 교육이라는 명칭 하에, 우와 열을 나눔으로써 경쟁을 심화시키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은 곧 패배자라는 논리로 귀결하여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경쟁이데올로기를 심화시켰다는 말이 되겠다. 글에서 계속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건강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게 교육이 아닌, 사회의 자원이 되는 이들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전형이라고 보며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입시 경쟁에서 이겨 올라가기 위해 파괴하고, 착취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이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고 끊임없이 개발하려 하는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것을 선호하고, 그 와중에 남을 챙기고 함께 간다는 것은 이러한 경쟁논리 속에서는 사랑, 돌봄과 같은 그 자체로 순결한 덕성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가 붕괴된 이 세계에서는 배부른 소리를 넘어 쓸데없는 짓이자, 체제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발전을 이룬 산업화 이후 인간은 날 때부터 소비주체로 길러져 교육이라는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본질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임에도 그것을 자본논리에 입각한 서비스로 여기게 되었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시장화 된 교육은 우리 사회상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경쟁교육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성장해 뒤처지는 이를 배척하는 게 당연시 될 뿐 아니라, 많은 돈을 버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추앙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져 의사 같은 고수익 직종을 갖길 희망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의료, 돌봄과 이어지는데, 경쟁논리 속에서 자라온 이들이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행위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인간의 덕성을 유린하는 모습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지 않은가.


경쟁교육은 우리에게 남을 밟고 홀로 올라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자립이 아닌 고립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거듭 강조하듯, 인간은 유한하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 의존해 오며 살아왔고, 이는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가 스스로 서는, 즉 자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연대하며 서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관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자립이 아닌 고립이면 주위를 둘러봤을 때 너무나 외롭지 않겠는가, 이것이 산업문명이 만들어 낸 공동체의 붕괴이자 인간소외다.


교육은 건강한 민주시민을 갈러내야 하지만, 산업화 이후 자연의 공생적 돌봄 경제를 파괴해 버린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런 경제 모델을 따라 이기적 주체를 키워낸 각자도생의 경쟁주의 교육은 우리가 자연의 돌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말하는 채효정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흙에 발을 디딘 채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왔으나, 기술문명은 흙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인간의 삶에서 추방시켰다. 흙이야 말로 만물의 어머니이자, 우리 삶의 원천임을 망각한 채 말이다. 경쟁은 인간을 지워낸 채 자원으로 획일화하였다.



결국, 다시 사랑과 연대를 외친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에서 말하는 돌봄의 상실은 모두 같은 결을 공유하고 있다. 저자들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체제가 불러일으킨 사회체제의 변화가 돌봄을 철저히 제도화•서비스화 하여 돌봄의 가치를 망각하게 했고,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돌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생태주의라는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필자가 ‘돌봄’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나중 가서 가슴 깊게 공감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기도 하다. 취약한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살아가기 위해 기대고자 하는 연대. 그를 통해 일궈낼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은 그동안 우리가 접한 글들에서도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시대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지배받고, 착취당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원초적 덕성마저 망각한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사랑과 연대를 다시 외쳐야 한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의 저자들이 각 글의 끝에서 강조한 것은 각자 다른 문장으로 쓰여 있지만, 그것을 축약해서 바라본다면 사랑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돌봄 체계의 확립이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틀에서 벗어나 작고 소박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양식일 것이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느껴지는 것처럼,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서로 다름과 취약성을 인지하고 살아감에 따라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사랑과 연대라는 가치는 굉장히 추상적인 이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난쏘공』에서 영수가 영호를 상대로 던진 “형은 이상주의자야”라는 말은 어쩌면 필자에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은 실현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갈 방향을 제시하며 헤매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척도가 되어준다. 존중받기보다 외면받기 쉬운 이상이라도, 우리가 이상을 품고 더 나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끝으로, 자신의 한계와 취약함을 아는 인간이 모여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박애정신을 품고 돌보는 연대를 꿈꾸는 것은 그저 필자 홀로 꾸는 꿈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안전하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의 삶을 품는 것이 곧 『돌봄이 돌보는 세계』에서 저자들이 이야기한 돌봄이자 삶이다. 지금에서야 책 제목이 다르게 읽힌다. 『사람이 사는 세계』라고. 기계화 된 인간상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계. 이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지만, 나는 다르게 부르고 싶다. 이것은 희망이다. 희망은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품을 수 있지 않은가.



참고문헌

우치다 타츠루. 2013. 『하류지향』. 민들레

김누리. 2024.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해냄출판사

조세희. 1975.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


표트르 A. 크로포트킨. 2015 (김훈 역. 2015). 『만물은 서로 돕는다』. 여름언덕

리 호이나키. 2007 (김종철 역. 2007). 『正意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녹색평론사


박민찬. 2024. “인간 된 삶에 대하여”. 브런치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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