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발자국 속 사랑

생태주의는 내 삶에 어떻게 왔는가.

by 박민찬

발자국을 뒤돌아 보며

대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 들어와 나만의 가치관을 구축해 살아가던 중, 문득 자문해 봤다. ‘나는 왜 생태주의자가 되었는가?’ 그러나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생태주의적 관점을 갖고 살아온 세월이 다른 이들에 비해 짧은 내가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건 어쩌면 우스운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의 삶을 하나로 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일평생을 바치셨던 분들에 비하면 나는 그분들의 글을 사숙하며 어깨너머로만 배운, 심지어는 그 세월조차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탐구하며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 지금, ‘생태주의’라는 맥락이 이전보다 새롭게, 한편으로는 진중하게 다가오니 생태주의를 흉내정도는 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태주의사상과 신념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사유하고 앞으로 나아갔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앞으로 꺼내는 담론이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는 죽은 언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다시 말해 삶에 대한 순수성과 열정이 살아 있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주창하기 위해서라도 내 사상의 원천을 근원적으로 돌아봐야 진정성 있는 담론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돌아보는 과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20년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밖에서 살아오며 정의(正意)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발자국을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한껏 품어본다.



자연과 함께 한 유년기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은 동네 놀이터와 옆에 있는 풀숲을 오가며 뛰어놀았던 장면이다.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그 사이에 꽤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느끼는데, 그때 풀밭에는 잠자리가 날아와 앉아 있어 숨죽이고 다가가 잠자리를 잡기도 했고, 가끔씩 들리는 개구리 소리에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뿐이랴, 곳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다 바지가 찢어지기도 했고, 근처 개천에 뛰어들어 물을 튀기며 놀고는 했다(나중에 들어보니 그 개천은 하수구 물이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내가 말한 기억 속 장면을 지금 실현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유년기의 나는 도처에 있는 동물, 흙, 나무, 물 같은 생명체들과 일체가 되어 살아갔다는 사실이다. 비록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유년기지만, 지금처럼 매캐한 연기가 우리를 뒤덮지 않고 동네 친구들과 관계 맺으며 살았던 그때, 나는 비로소 삶의 즐거움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인간상이 처음 뿌리내린 게 바로 그 시기였고, 자연뿐 아니라 동네 친구들과 해질녘까지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미화된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그 속설을 낱낱이 파헤쳐 보면, 대부분의 이들도 근심 없이 친구들과 하루를 보내며 살아간 기억이 있을 것인데,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사람과 함께 만날 ‘공간’이 있었을 거라고 과감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사람과 공간을 이어주는 것은 언제나 ‘흙바닥’이지 않았을까. 현재를 살아가며 흙에 발을 디디고 활동할 기회가 있을 때, 흙바닥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어머니가 구독해 주신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유년기에 지향했던 삶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터득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언어로 나타내는 과정에는 이 잡지의 힘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 그 시절에 자기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내 언어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잡지의 글과 만화에서 나타나는 ‘자연’, ‘생태’, ‘함께’, ‘존중’과 같은 가치를 눈으로 읽으며 생각을 확립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런 예시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아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생각을 대변(정리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다.)한다면, 나를 포함한 그때의 아이들은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확립하지 않았나 싶다. 이때 확립한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뇌리에 각인되어 그것이 사상이 되고 신념이 되어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책을 읽고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결코 가볍지 않게 던져본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때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이 곧 생각이 되었고, 생각은 곧 가치관이 되었다. 유년기에는 이 이야기를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스무 살이 되어 그때 어렴풋이 가졌던 생각을 써내고 있자니 싱숭생숭한 감정이 올라온다. 앞에서 말했듯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건 누구에게나 있어 특별한 경험인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고, 그 안에서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너무나 의미 있었다는 말을 여기서나마 해본다.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자연과 함께 살았던 유년시절은 정의(正意)의 길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주었고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10대의 삶, 대안교육

유년을 보내고 10대가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며 진실게임, 축구, 아파트 단지 안에서 진행하는 술래잡기, 비밀기지 만들기 등 정말 다양하게 놀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이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만 해도 산업문명이 우리 삶에 그렇게 깊숙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흙바닥에서 먼지 날리도록 놀다 들어와 무릎에 묻은 시꺼먼 먼지를 박박 닦아내고는 했다. 회고해 보면 그때가 가장 즐거웠다. 언제 놀이터에 나가도 누군가 있을 거라는 기대, 모르는 친구가 와도 환대해 주던 그때의 온기를 추억할 때마다 과거미화라는 말을 붙여도 그것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때는 우리의 삶에 기계와는 멀리 떨어진 인간성이라는 게 있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을 넘기고 나니 무언가 바뀌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이다. 늘 놀던 놀이터에 친구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나갔더니 텅 빈 놀이터만이 나를 반겨주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실망감에 뒤돌아 집으로 와 핸드폰으로 게임을 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냉랭하게 남아 있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의 풍경은 그때까지 내가 살면서 본 풍경 중 가장 삭막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놀이터에서 놀기보다는 친구들과 온라인에 접속해 만남을 택했던 것 같다. 내가 갖고 살았던, 정확히 말하면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었던 ‘자연’, ‘함께’라는 가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오래된 기억처럼 어두운 한켠에 밀려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 역시 미디어와의 만남, 모바일 게임과 같은 산업문명의 부산물을 접하며, 그것이 곧 당연해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나는 앞으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선택을 하게 됐다. 집 앞에 있는 일반 중학교를 갈 것인지, 혹은 가보지 않은 길인 대안교육을 택할 것인지 선택과 고민을 하던 중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너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 곳을 택해라”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더불어가는배움터길(이하 배움터길)이라는 대안학교에서 10대를 보내게 되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곳에서 어렴풋이 품고 있던 생각을 언어로 나타낼 수 있게 되었고, 읽고, 쓰고, 말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립시키기 시작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내가 내린 결정이니 믿고 따라야 했겠지만, 그 당시 선생님이 건네주신 말씀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척도가 되어주었다.


배움터길에서의 배움과 그것의 의미는 다른 글에서 심층 깊게 다루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넓고 깊었으며,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나눔이라는 가치에서 비롯되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 경쟁교육에서 벗어나 서로의 삶을 넘나드는 배움을 행했던 게 바로 배움터길에서의 배움이었는데, 남들이 하는 입시교육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걷기 위한 준비, 그리고 길을 찾는 과정에서의 실수를 겸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던 나의 배움은 삶에 대한 순수성과 열정을 확립하는 데 충분했다.


동양철학의 대부라고 말할 수 있는 공자는 지학(志學)이라는 말을 통해 10대가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공자의 말을 나에게 조명해 본다면 자신의 가치관이 확립되는 10대에 생태적 상상력을 재조명하고 확립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배움터길에서의 대안교육을 통해 삶을 스스로 꾸리고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여정을 향해 발을 디뎠기 때문일 것이며, 유년기의 경험과 10대의 기억, 그리고 배움터길에서의 경험들은 내가 생태주의적 관점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갖고 있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 쉬었던 소중한 기억들이 한데 모여 10대의 삶을 나만의 것으로 꾸려갈 수 있었다는 회고를 해본다.



『녹색평론』을 통한 사유

배움터길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삶,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며 내 생각이 어떤지 알 수 있던 때가 되었을 때 마침 <인문학의 숲>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었다. 나는 <인문학의 숲> 수업을 우리 사회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기르는 수업이었다고 정리하려 하는데, 그때 김종철 선생님의 『녹색평론』 창간사를 읽었던 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고 시작한 김종철 선생님의 글은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문명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우리의 정신적 지주인 흙을 비롯한 자연이 오염되는 현시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에 대해 통렬한 호소를 담은 글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방에 좌르륵 놓여 있던 『녹색평론』과 발행인이신 김종철 선생님의 성함은 들어봤지만, 그것이 모두 내가 살아온 삶과 연결된다는 걸 마주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년의 내가 느꼈던 즐거웠던 삶, 4학년 겨울방학에 마주했던 텅 빈 놀이터, 대안교육과 같은 삶의 굵직한 과정들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는 원초적 인간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니 1991년에 쓰인 글 속에 스마트폰(산업문명)이 생활에 들어옴으로써 사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깊이 담겨 있는 걸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즉 『녹색평론』 창간사에서는 내가 그동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채 몸으로만 느꼈던 기이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인 18살의 나에게 경험과 배움이 이어진다는 사실은 내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때서야 ‘배움터길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으며,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녹색평론』의 언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힘든 언어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 역시 산업문명사회에 순응한 채 살아가고 있던 시기를 겪었고, 그때 접한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의 언어를 곧 진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가 조금 멀게 느껴진 건 그리 이상한 게 아닐 것이다(이때 정말 무서운 사실은 미디어를 삶 속에 끌어들인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녹색평론』의 언어는 내게 조금 멀었으나, 그럼에도 다시 나아가기 시작한 까닭은 아직 내게 남아 있던, 단순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나와 비슷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나누고 싶기 위해서라는, 즉 인간 된 삶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성인이 된 올해는 대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정신적으로 교류하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가치관을 제대로 잡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녹색평론』 안에 있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산업문명으로 인해 망가진 우정과 사랑 같은 가치들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었고, 『녹색평론』은 항상 새로운 언어를 제공해 주었다. 나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것은 곧 세계인식의 틀이 되었고, 이 과정을 몸으로 겪으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쯤에서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과 녹색평론사가 출판한 책은 나에게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원초적 인간성을 건드려 주었으며 그 과정을 거친 나는 그 언어를 받아들이며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해 어느새 『녹색평론』의 문체를 어설프게나마 사용하고 있게 되었다는 말로 정리해봐야 함직하다. 생태주의라는 사상은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인간과 함께 살아왔던 자연 곁에서 인간은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라는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니 자연 속에서 살아온 내가 흥미와 즐거움을 가지지 않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의 삶을 초록빛으로 사랑한다.

결국 내가 갖고 있던 생태주의적 사상은 자연과 함께 동화되어 살아가며 산업문명사회가 공동체에 가하는 폭력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상이며,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삶의 궤적이 순탄하지 않고, 어떨 땐 포물선을, 어떨 땐 쭉 나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규정해 주는 순간을 만들어주었으니 그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으며, 스스로의 가치관이자 지향해야 할 바라고 생각하는 생태주의라는 사상과 나라는 인간을 동시에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에세이에서 생태주의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할 순 없으나, 인간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을 자연과 하나 된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갈 존재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 내가 느끼는 생태주의 사상의 핵심적 가치라고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생태주의, 그것은 나의 삶의 과정이자 전부가 될 것이다.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 배움터길 안에서 맺은 소중하고 싶은 관계들, 그리고 『녹색평론』 안에서 만난 수많은 선생님들과 연결되어 배움의 공동체를 꾸린 상태로 진정으로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는 정의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이 앞으로의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산업문명으로 인한 개발로 자연이라는 어머니를 사지로 내몬 인간중심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랑’과 ‘연대’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 덕성을 망각하고 있다. 다른 이와 연결되기보다는 단절을, 사유하기보다는 무사유를, 맞서기보다는 순응을 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지고 가야 할 가치는 결국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사랑과 연대라는 가치를 찾아 나가는 발걸음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지섭이 이야기한 ‘죽은 땅’은 우리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말하지만, 기계화된 인간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시기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쩌면 희망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생태주의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랑과 연대와 같은 가치를 삶에 녹여내는 과정을 보면 가슴이 절로 따뜻해지니 말이다.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만들며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찾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과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 하나의 작은 마을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진정으로 인간 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초록빛 발걸음이 하나가 아니길 바라는 동시에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옆에서 부축해 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라면 먼 훗날, 자연이라는 어머니를 만나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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