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교육은 야만이다>- 김누리
대한민국의 교육은?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교육다운 교육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교육이 존엄한 인간, 개성 있는 자유인,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일이라면 대한민국은 교육은 해본 적이 없는 나라라는 얘깁니다.” 대한민국의 교육 신화를 벌거벗기며 시작하는 첫 문장이 굉장히 강렬하다. 세 줄 남짓한 짧은 문장 안에서 교육을 꼬집는 동시에 교육의 본질을 묻는 저자 김누리 교수의 말은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물으며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통렬한 호소로 보인다. 우리는 김누리 교수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가? 여기 대한민국의 교육에서 문제점을 찾으며 교육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교육의 실상이 어떤지 낱낱이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우선, ‘경쟁’이라는 단어만큼 대한민국의 교육을 잘 나타내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살을 붙이면 대한민국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경쟁을 부추기고 능력주의와 계급사회로 점철된 사회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게끔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앞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교육이 “존엄한 인간, 개성 있는 자유인,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일”이라는 전제 하에 대한민국의 교육은 그것에 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호흡을 깊게 머금고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에 필요한 무언가를 배우는 게 아닌, 경쟁을 위해 필요한 죽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기 바쁘지 않은가. 김누리 교수가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 게 대한민국의 교육이다.
아이들이 죽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까닭은 궁극적으로 대입을 위한 시험을 치기 위해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시험의 채점은 컴퓨터가 진행하고, 아이들은 이미 정해진 답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찾기’에 바쁘다. 그런데 컴퓨터에게 물어보면 다 아는 정답을 왜 알아야 하는 것인가? 좋든 싫든 4차 산업혁명에 이른 현재, 정답을 암기하게끔 하는 교육은 시대상과는 전혀 맞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대체하는 이 시대에서 진정으로 아이들, 더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상상, 사유, 공감능력임에도 기계가 채점을 하고 거기에 맞는 답안을 찾는 게 대한민국의 교육이라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기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인적자원’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대한민국의 교육이 국가의 부품을 기르고 있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교육은 아이들의 자아를 짓밟으며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태일 열사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외친 그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학생들에게 닿았다. 기계가 아님에도 기계처럼 길러지는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살인적인 경쟁교육 속에 내몰려 일상적으로 열등과 모멸을 겪는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것을 ‘파쇼 교육의 전형’이라고 칭하는데, 성적에 따라 아이들의 우열을 나누는 게 전형적인 일상의 파시즘이라고 말하며 경쟁과 우열이 지배하는 학교의 환경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한 채 점점 자아가 약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일상의 파시즘이 학교 교육을 지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다. 그 앞에 참담해지는 현실이 한국교육의 현 위치며, 그 참상을 보고 이유 모를 구역질이 난다면 아직 당신의 몸 안에 원초적 거부감과 같은 인간성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마이클 센델은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공정사회 이데올로기의 능력주의 체제를 비판한다. 센델은 “사회의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각자도생에 초점이 맞춰진”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경쟁의 승자가 패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우월감도 우월감이지만,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노력이 부족했다.’ 내지는 ‘내가 능력이 없고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며 위축되게 만드는 구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능력주의의 체제가 전복되지 않고 계속 영위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것은 곧 승자만이 풍족한 삶을 살 자격이 있고, 패자는 낙오되어 빈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체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센델의 말을 조금 더 자세히 파헤쳐 보면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소위 ‘승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그들만의 체제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며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곤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센델은 서구의 사례를 들며 능력주의와 공정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지만, 대한민국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서구의 것이라면 무작정 수용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보아 왔듯이 말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역시 앞에서 말한 바 있듯, 경쟁을 부추기고 우와 열을 가리며 아이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고 있는 만큼 센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교육에까지 스며듦으로써 경쟁교육을 받은 이들이 사회로 나가 그 영향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 익숙해졌고, 경쟁교육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회색빛이 되어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사유 없이 자신의 쓸모와 상품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신의 쓸모와 상품성을 증명하는 것은 다른 이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을 텐데, 이는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자신을 스스로 기계화하여 사회의 부품이 되겠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교육은 한 사람이 사회에 스며들어 함께 숨 쉬며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한다는(성숙해져 가는) 것에 그 의의가 있지만, 경쟁교육은 경쟁을 통해 인간을 기계화 내지는 자원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교육은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냈으며, 그 핵심인 경쟁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다. 모든 불평등과 능력주의 신화로 점철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만이 지고지순한 교육의 목적이 돼버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사회의 모든 혜택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오랜 시간 동안 강고하게 굳어졌으며, 소위 엘리트라 칭하는 이들이 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우리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인간적인 삶, 우애와 환대의 가치를 잃어버린 이들이 단순히 ‘더 나은 인간’이라고 정의되어 버린다면 과연 더 나은 사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가져야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러한 일말의 여지조차 없애고 있었다. ‘인간은 다른 이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김질하여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고립시키는 사회상에 대해 사유해 보았으면 한다.
학교의 존재이유, 그리고 산업혁명
오에 겐자부로는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라는 에세이에서 “학교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풀어보면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닌, 친구들을 만나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과정을 지내며 그를 통해 자신이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끔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즐거웠던 기억을 가만히 회상해 보면 그 안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는가. 이를테면, 학교에 들어갈 때 따뜻하게 맞아주던 안전 선생님의 모습, 쉬는 시간에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 등등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과 즐거움을 느꼈다. 물론 여기서 하는 말에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좋든 싫든 학교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시간이 지나고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이 기억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책상 위 문제집이나 교과서에 있던 내용을 전부 기억하진 않을 것이니 말이다.
즉, 학교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마음껏 실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그 실수를 통해 사유하고 나눔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은 앞서 말했듯 자아를 짓밟고 모두가 똑같은 인간으로 ‘생산’되길 바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인간의 사고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여 사람, 사물, 공간을 초연결, 초지능화하여 정보사회시스템에 혁신을 일으켰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말에는 허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대부분 ‘맡긴다’ 내지는 ‘편리하게 대신’한다고 말하지만, 톺아보면 ‘대체’됨으로써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어딘가 뒤틀린 사회 속에서 교육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데, 김누리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에게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공감능력, 창의력, 사유 능력이 요구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인간이 기계적으로 변했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공감능력, 창의력, 사유능력 역시 말이다. 생성형 AI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는 시대, 하물며 AI에게 심리상담까지 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묻는 사회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다 보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수용하고 그에 따른 인간성을 제시할 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부작용과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점을 통해 기계적인 인간의 삶을 지적했으면 하는 바람 역시 있었으나, 좋든 싫든 이미 도래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더 이상 우리의 사고가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아직 기계에게 잠식당하지 않은 이들이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넌지시 던져본다.
지금 필요한 교육은
경쟁 이데올로기는 결국 자본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에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자 경쟁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상임을 알 수 있는데, 반대로 말하면 자본이 아닌, 우애와 의협심, 공동체 정신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건드려 자본 이데올로기에 맞서고자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김누리 교수는 교육혁명과 사회혁명 중 어떤 게 먼저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쟁에 대해 사회혁명을 위한 시민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혁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교육을 바꾸려면 그에 따른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는 사회혁명이 필요할 수 있으나, 교육을 통해 이러한 논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듯하다.
문득 “사회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학벌사회 속에서 사활을 건 전쟁터가 되어 버린 교실은 과연 행복한지도 세세히 살펴보면 당장 옆에 있는 친구가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자신의 성적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니 아이들은 학교에서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없다. 자아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의 아이들이 기계화되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생각 없는 악’을 행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경쟁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이들이 사유하지 못한 채 만들어 나갈 사회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것만으로 우리가 교육을 바꿔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김누리 교수는 독일 교육의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여러 방안을 제시한다. 비판하고 사유하고자 하는 독일의 문화와 교육 환경을 보고 있으면 가히 놀랄 만하다. 교육은 우와 열을 가리는 수직적 인간이 아닌 다른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수평적 인간을 길러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병든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고 연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육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연대 아닐까. 사유하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어른들이 인간성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더는 침묵할 수 없게 될 때가 되어서야 조금 더 인간다운 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다운 교육을 한 적 없는 나라에서 서로의 삶이 넘나드는 진정한 교육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사람은 다른 이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타인과 연대할 수 없다면 사유할 힘을 잃게 될뿐더러, 배움의 공동체와 연대하는 일은 그저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사회는 경쟁을 걷어내고 이기적인 욕망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향한 사랑만이 고스란히 남겨져 빛을 내고 있으리라.
참고문헌
김누리. 2024.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해냄출판사
마이클 센델. 2020. 『공정하다는 착각』. 미래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