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 나아가는 나에게

대학 한 학기, 나는 무엇이 바뀌었나.

by 박민찬

새로운 세계로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걸 나타내는 뜻이지만,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전이었던 올해 초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작년 대학 입시에 합격해 함께 걸어온 길에서 한 걸음 나아가 더 큰 배움의 세계를 만날 수 있던 나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아니 같은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을 만나고자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글은 내가 대학 생활 한 학기를 회고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과 순간 속에 있었던 배움을 기록하는 글이라 할 수 있겠다.


입학(예비대학), 그리고 새내기새로배움터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던 학교에 신입생의 신분으로 가게 되니 굉장히 낯설었던 그때의 기분이 생생하다. 처음 보는 선배들과 친구들은 낯섦이라는 감정을 배가시켜 주었고, 입학식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신입생들을 웃으며 환대해 준 선배들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내가 이 학교에 온 이유를 다시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의 관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곳에 깊게 뿌리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예비대학 순서 중 교수님들을 앞에 모셔 소개할 때 느꼈지만, 교수님들도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갖고 학생들을 만나고 계시는 것 같았고, 학교의 문화, 시설을 소개해 주는 캠퍼스 투어 시간에도 학교의 가치와 학풍을 녹여내며 학교에 애정을 갖고 있는 구성원들의 모습은 내가 갖고 있던 일말의 불안도 없어지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 낯선 공간에 가서 단번에 적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낯섦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 공간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구성원이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아준다면 낯섦은 설렘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했다. ‘배움터길에 오는 신입생들이 이런 기분이겠다.’는 생각. 나는 이곳에서 신입생이었고, 지원교사와 같은 선배들에게 안내를 받으며 학교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4년 중 신입생으로 보낼 1년을 아낌없이, 후회 없이 보내겠다는 다짐을 한 게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준비된 예비대학의 순서를 모두 마치고 뒤풀이를 할 때를 빼놓을 수가 없겠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들이 모였으니 술을 마신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했고, 과음하는 친구들도 이따금 나올 수밖에 없기 마련이니 어느 정도 사람에 대한 이해가 생긴 그때의 나는 자칫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치근덕대는 게 아닌가. 술에 많이 취해 있던 그 친구는 악수를 청하며 내 손을 꽉 움켜쥐었고, 앞에 앉아 있던 누나의 손 역시 꽉 움켜잡았다. 딱 봐도 많이 취해 보였기 때문에 조금 쉬어야겠다는 말을 건네고 등을 두드리던 기억이 참 오래도 남아 있다. 내가 조금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친구의 모습을 거울삼아 술에 거나하게 취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동시에 나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더 이상 누군가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대학 입학식이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얼마 후, 새내기새로배움터(이하 새터) 행사에 2박 3일간 참여하게 되었다. 예비대학 때(주로 뒤풀이 때) 친해진 친구들도 있어 기대가 됐지만, 무엇보다 앞으로의 4년을 함께 할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4조에 배정받은 나는 톡방이 만들어져 있는 만큼 이름과 얼굴 정도만 매치시키면 되겠거니 생각을 하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옆자리에는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친해진 친구가 앉아 있었고, 앞으로 동아리를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 두 명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앞날의 얘기니 그때의 얘기부터 하면, 대학에 와서 가장 먼저 친해진 친구 –물론 당시에 초면이었다.- 가 나보고 했던 “혹시, 재수하셨어요?(오역의 여지가 있다.)”라는 말이 기억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이때 얘기를 하며 서로 깔깔대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장과 부조장은 각각 3학년, 1학년(24학번이지만, 2학기 휴학) 누나였다. 조장, 부조장을 맡았던 누나들 덕분에 더욱 의미 깊은 새터가 될 수 있었는데, 이 얘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당시에도 의미 깊게 생각한 부분인데, 우리 학교의 새터는 다른 학교와 다르게 채식식단, 성중립방과 같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움터길에서 접했던 귀중한 가치들이 실현되고 있는 곳에 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글이 자칫 평가하는 글이 될까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를 조성해 온 성공회대학교의 학풍에서 왜인지 모르는 익숙함을 느꼈다는 사실을 꼭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학교에서의 동아리 박람회를 마친 후 새터 행사가 진행될 강화도로 출발했다. 새터의 모든 일정을 여기에 다 나열할 수는 없으니 당시의 생각의 흔적들을 정리해 보면, 다른 학교에도 비슷한 게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학교의 새터에는 ‘교양’ 시간이 있었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올린 대학등록금과 거기서 파생된 여러 문제점을 교수님이 오셔서 설명해 주시는 시간과, 인권에 대한 인식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학교 문화로 가져갈 수 있게끔 하는 시간이었다. 두 개가 각각 다른 시간에 진행되었고, 새터에 참여한 신입생들은 이 교양 두 개를 반드시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신입생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술 먹고 공연을 보며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수업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내재된 참뜻은 성인이 되었으니 기본적인 교육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러한 교양시간에 학교의 문화가 잘 드러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등록금 문제만 봐도 학교의 단독적인 결정에 무감각하게 수용하게 될 경우, 학생의 권리는 점점 사라지고 급기야는 학교의 입맛대로 굴려질지 모르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교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강의라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었으나 등록금과 더불어 대학의 서열화 같은 사회문제도 함께 다루며 우리가 피부로 느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와 더불어 인권교양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 그것은 대학이란 공간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이었으며 자신만의 안전을 챙기기 바쁜 현 시대상에 맞는 교육이었다. 인권위원회에서 주최한 강의였고, 무엇보다 채식, 성중립방 같은 요소가 마련된 새터에서 하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학생사회를 향해 정진하고자 하는 학교의 문화가 참 마음에 들었다.


조금 활기찬 이야기를 해보면, 인권 교양과 학부별 프로그램, 동아리 공연 등으로 진행된 새터 프로그램 속에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우고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게 배움이라고 그랬던가. 내가 살아오며 당연하게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들이 지켜지는 공간에서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아까 말한 조장을 맡았던 누나들이 조원들을 잘 챙겨주고, 활발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나 역시 보다 편안하게 조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배움터길에서 해왔던 것처럼 웃으며 다가가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면 됐다. 조 친구들 역시 좋은 친구들이었고, 다 같이 술 마시며 웃고 떠들다 밤이 가버려 다음 날이 아닌 오늘을 준비해야 할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우리가 늦게 잠에 들수록 새기단 선배들의 수면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지원교사로 살았던 지난해의 경험이 있으니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만큼 내가 배움터길 학생들에게 내심 바랐던 행동을 직접 해보는 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나도 모르게 한 뼘 더 성장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즐기러 갔지만, 즐겁게 배우고 왔다는 말이 딱 맞겠다.


개강, 적응

새터를 마치고 며칠을 쉬었을까. 개강일이 찾아왔다. 설레고 풋풋한, 그리고 따스한 개강을 내심 바랐건만 나의 첫 개강 풍경은 겨울이 채 가시지 않고 비가 내리는 울적하기만 한 풍경이었다. 첫 수업은 교양필수 수업인 <인권과 평화>였으며 예비대학, 새터 때 안면을 튼 친구들의 옆자리에 앉아 심심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개강을 하고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살아온 삶의 흔적을 여기서도 녹여내면 됐다. 우정과 환대, 공동체 정신과 같은 덕성이라는 미덕이 내쳐지지 않는 안전한 공동체인 이곳은 내가 주체적으로 배움을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학생회에 들어갔다. 내가 이 학교에 온 이유 중 하나는 학생이 스스로 학교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학생자치 문화가 잘 꾸려져 있으며, 자신의 삶 속에서 주도성을 잃고 싶지 않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대학에 오기 전 학생회장, 학생연대회장과 같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정립한 것들을 더 넓은 세계에서 나눠보며 학교라는 공간이 늘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했고, 그 뒤에 내가 있길 바라는 마음 역시 있었다. 무엇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신념을 갖고 폭넓은 배움을 위한 도전을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학생회에 들어갔고 배움터길에서 했던 경험을 살리고자 ‘사업기획국’이라는, 쉽게 말해 학우들이 즐길 수 있는 MT나 축제 등을 기획하는 부서에 들어가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자 했다. 익숙한 경험을 다른 곳에서도 하는 건 역시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동아리도 하나 들었다. “작은 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만든다.”는 슬로건 아래, 공연을 기획하는 동아리였는데, 새터에서 우리 조 조장을 맡았던 누나가 자신에게 의미 있고, 애정하는 동아리라고 소개해줘서 끌리기도 했지만, 무언가를 기획하는 걸 즐기는 나로서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동아리에도 들며 내가 하고 싶은 배움을 맘껏 개척해 나갈 대학생활의 막을 열었다. 아래부터는 내가 한 학기 동안 행해 왔고, 또는 진행 중인 활동을 읊으며 어떤 배움이 있었는지를 톺아보고자 한다.



사회융합학부 학생회 ‘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 되는 문화에 이바지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들과 학교에서 살아 숨 쉬며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회에 들어가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학생회를 하며 같은 학번 친구들과 더 친해지기도 하고, 선배들과도 안면을 트며 즐거운 학교생활의 기반을 다졌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아직 한 학기만 활동했기 때문에 어떤 걸 배웠는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다 말하긴 어려우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대학에서 강의만 듣는 게 배움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보다 폭넓은 배움을 행할 수 있는 곳에 왔고.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으니 그것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학생회가 없는 다른 학부와는 다르게 우리 학부는 학생회가 있었고 학생회의 문화 역시 나쁘지 않았다. 1학기가 끝난 지금의 시선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간을 이해하고 학우들이 학교를 더 즐겁게 다닐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고자 하는 학생회에서 활동했음에 감사하다.


물론 이 공동체에서도 자신이 맡은 바를 다 하지 않는 구성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도 느꼈다. 새터를 기획한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학생회에 들어온 학우들의 초심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뭐 어쩌랴.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우선순위는 각자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맡은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회의를 뺄 방법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의견을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서로 불편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오점 하나 없이 한 학기를 보낸 건 아니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다 한 학생회 구성원들 덕분에 한 학기를 잘 마쳤다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배움터길에서 해왔던 자치활동의 근육들이 움직여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느꼈고, 기획, 실행, 그리고 함께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그리고자 했던 순간들이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묘했다. 인간다운 삶, 우정과 환대로 다른 이의 삶과 결합하는 삶을 학생회에서도 그릴 수 있었다. 내 곁에서 늘 함께 했던 배움터길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4.16 세월호 추모주간

2014년 4월 16일. 배가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버린 ‘사건’으로 기억하는 날이다. 10년이 넘은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란 리본들이 흩날리고 있다. 흩날리는 노란 리본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이 학교에서 인간의 원초적 덕성을 다시금 배우러 온 게 아닐까.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살아가는 그런 덕성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토요일 하루에 걸쳐 진행된 안산기행과 4월에 진행된 세월호 추모주간은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던 기회였다. 안산에서 또렷이 들렸던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그때 내가 눈을 떼지 못한 것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세상에 남겼던 흔적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국가가 진실을 침몰시키지 않도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볼 때는 우리가 이때의 참사를 잊으면 그들이 살아왔던 삶의 과정도 잊히기 때문일 것이랴. 진상을 밝히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것과 더불어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우리 가슴에 남아 있도록 기억하는 것이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온기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억은 힘이 세다.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닌 우리의 기억은 세상에 발붙이고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우리의 기억이 모여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행을 다녀오고 얼마 후 학교에서 진행된 세월호 추모기간 행사는 유가족 간담회, 다큐상영회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가족 간담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다큐상영회에서 자리를 지키니 4월 16일을 기억하자는 학우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다큐는 추모주간을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긴 다큐였으니 말이다.

열한 번째 봄이 찾아왔다. 그 세월에 못 이겨 기억이 마모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연대하고 기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가치를 일깨워준 게 세월호 추모기간이었다. 열두 번째 봄에도 내 주변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기를 바란다.



5.18 광주 기행

계엄 후 찾았던 광주, 계엄을 일으킨 내란범이 탄핵되고 난 후 찾았던 광주의 날씨는 참 좋았다. 어느덧 40년이 넘었던 광주민주항쟁의 흔적을 찾아다녔던 5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역시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배움이었는데, 머리로만 알던 것을 가슴으로 느낄 때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연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투쟁의 역사는 아름다웠으나, 그 과정은 솔직히 말해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고문과 탄압을 받으면서까지 지켜낸 민주주의의 불씨가 자칫 꺼질 뻔했던 최근의 사태가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남대학교, 전남도청, 518 묘역 등 역사의 순간이 생생히 깃든 장소들을 돌아보며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해설단을 맡거나, 대동제 기획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온전히 참여자의 입장에서 준비된 순서를 맞이하며 광주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텍스트로 보던 것과는 달랐다. 가슴으로 현장을 바라보며 비극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민중이 권력을 잡아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맞물려 내게 큰 배움을 주었다. 책과 텍스트에만 갇혀 있지 않고 배움을 찾아 떠난 여정의 화살이 가슴 깊이 꽂혔다.


나는 광주에 다녀와서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이 글이 광주기행을 다녀온 소회를 잘 나타낼 수 있을 거라 본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산 자의 가슴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의를 향해 내딛은 그들의 발걸음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그들은 자신이 택한 길이 자신의 양심의 명령이므로 진리이며, 역사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라 확신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데에 있음에도 과연 우리가 해방되었냐고 묻는다면 섣불리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의 순간을 찰나로만 남기지 않고 가슴속에 머무르게 한다면 어떨까. 삶의 의미와 가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 뼘 더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45년이 지났다. 내가 푸르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배움의 순간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이 택한 진리를 향한 발걸음 덕분이랴.

올해 5월은 참 맑았다. 맑고 화창한 날씨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기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안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향해 내딛은 발걸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의 발걸음을 기억하며.”



문화기획동아리 ‘퍼즐’

“작은 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만든다.”는 슬로건 아래 운영되고 있는 동아리 <퍼즐>은 새터에서 조장을 맡았던 누나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준 동아리다. 처음에는 공연을 기획하는 동아리라 익숙한 향수에 발걸음이 끌렸으나, 나중에 와서는 너무나 좋은 동아리의 문화에 나도 모르게 감화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회고를 더 해보자면, 즐거움으로 가득 찬 동아리활동이었고, 대학에서의 첫 동아리를 이렇게 좋은 곳에서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른 학부의 친구들과도 친해지고, 무엇보다 새터에서 같은 조였던 친구들도 두 명이 있어서 더 즐겁게 남았나 보다.


사실 나는 공연을 올렸을 때의 뿌듯함보다는 이 안에서 만들어진 인간관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우선 동아리의 회장, 부회장을 맡았던 선배들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주었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더 나은 동아리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단순한 추억 미화가 아니라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퍼즐에서 활동하며 가장 후회가 남았던 일이 사적인 일정을 잡아두고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하루뿐이지만,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날 카톡방에 올라온 동아리 회장, 부회장을 맡고 있던 선배들의 메시지에는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니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자는 말과 함께 회의참여를 독려하고자 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이때 스스로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동안 행해온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고, 이것이 고스란히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동아리는 늘 그렇듯 환대하는 분위기로 그동안의 저조했던 참여율을 메꾸어 나갔다. 여기에는 회장단을 맡았던 선배들의 노고도 있지만, 모두가 함께 공연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 즉 올바른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어나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뒤늦게서야 해본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꼭 해보라는 이야기를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같은 학부나 학과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는 게 아닌, 다른 분야의 이들과 교류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히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 된 삶을 향한 여정의 기틀을 마련하는 거다. 배움의 공동체를 꾸린다는 말로 설명이 되겠다.


다음 학기에 나는 퍼즐에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동아리를 하느라 너무 바쁠 것 같아서다. 하지만, 퍼즐에서 활동하며 배운 다 같이 만들어가는 움직임, 퍼즐에서 찾은 의미 있는 관계들이 시간이 흘러도 내 곁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직 울퉁불퉁한 작은 조각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의 빈칸이 남아 있는 무언가를 찾아가 그림을 완성해 보고자 한다.



깊은 학문, 의미 있었던 강의들


<더불어숲인문학, 삶을 위한 인문공부>- 고병헌 교수님

월요일 9시, 통학 루트가 복잡한 내게 있어서는 쉽지 않은 시간대의 수업이었다. 그러나 이 수업을 듣고자 한 이유는 명확했다. 애당초 인간 된 삶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다른 이와 삶의 과정을 나누고 인문학적인 소양을 닦아 건강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자라고 싶은 까닭에서였다.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듣는 학우들,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디지털기기를 사이에 둔 채 교류하지 않는 다른 수업들과 달리, 교수님이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외우고, 교탁이 아닌 학생들의 책상을 넘나들며 강의하는 모습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훌륭한 분을 만났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정신없이 흘렀던 1학기 동안 이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회고해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서로의 눈을 맞추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들과 삶의 흔적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서 나는 내 배움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뭐랄까. 대안학교와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수와 학생이 일방적인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생각을 나누며 그를 통한 교학상장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그랬다.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있어 이 강의는 재수강을 해서라도 듣고 싶은 강의였다. 강의명인 <삶을 위한 인문공부>에서 드러나듯 4차 산업혁명에 이르러 인간의 사고가 대체되고, 돌봄 같은 인간의 원초적 덕성마저 철저히 자본화되고, 유린되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배움의 의미,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강의인지라 인문적 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업에 따라오긴 조금 버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들기도 했다. 다만,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때, 다시 말해 책상을 밟고 올라서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시선과 다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배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알에서 깨어난 새가 날아오를 때가 돼서야 교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이 깨달은 것을 기말고사 에세이를 통해 정리하여 더 나은 배움을 향해 정진할 수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월요일 오전 수업인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나도 모르게 한 뼘 더 성숙해지고 있었다. 알고리즘, 거대기술에 침식된 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인간 된 마음가짐을 가져가는 나를 발견하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각자의 삶을 나누고 고민을 함께 나누었던 발표시간 역시 의미 있었다. 나와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고 내 삶으로 받아들이며 배움의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과정이었고, 다른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나의 발표는 조금 아쉬웠다. 준비가 부족했고, 내 삶의 고민을 다른 이들과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컨디션 관리를 잘하지 못해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역부족이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후회가 막심하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말과 개념으로 세상을 지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강의를 1학년 1학기 때 들을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월요일 오전에 공동체에 대한 이해,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을 배우며 일주일을, 아니, 앞으로의 4년을 그려볼 수 있었다. 진정성 있는 교수님의 강의, 우리의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기억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인권과 평화>- 강성현 교수님

1학년 필수 수업, 그만큼 얻어간 게 많았던 수업,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혀준 수업 등등 <인권과 평화> 수업을 나타내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진솔한 이야기를 써보자면 나는 이 강의가 너무나 맘에 들었다. 학기 초반에는 물론 1시간 50분 수업을 쉬는 시간 없이 달리는 교수님이 밉기도 했으나, 수업을 같이 듣는 형에게 그런 교수님이 잘 없으며, 오히려 열정적으로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교수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너무 나태해졌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배움을 흥정하고 불쾌함이라는 화폐로 치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얕았던 그간의 지식을 조금 더 폭넓게 확장하고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박애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강의이지 않았는가. 시작과 끝이 미묘하게 다른 강의였다는 생각을 한다.


수업 초기에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의 영향으로 나도 모르게 풀강을 안 하는 교수님이 좋은 교수님이라는 생각까지 하기 이르렀다. 출튀를 하는 친구, 무단결석을 하는 친구 등등 막 나가는 친구들 곁에 있으니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을 길러주고자 하시는 교수님의 진심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존 적도 있었고, 불쾌함을 속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업이 기다려졌다. 끝 무렵, 그것도 합반 강의 날이 다가왔을 때였다. 학기가 다 끝나가고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 내 생각의 틀이 확실하게 잡히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삶의 가치가 머릿속에 머물렀다. ‘함께’, ‘우정’, ‘인간성’과 같은 배움터길에서 접했던 귀중한 가치들이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과 한 데 엮여 기하급수적으로 아는 게 늘어났다. 아니, 나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이 성공회대의 가치이자 슬로건인 ‘인권과 평화’를 내포하고 있는 과목인 만큼, 성공회대의 학풍을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했을뿐더러, 무엇보다 강의내용에 진심을 담아주신 교수님 덕분에 필수수업임에도 의무감으로 수강해야 하는 불쾌함이 아닌, 어떤 것을 새로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다른 수업에 비해 과제량이 많다는 것도 할 말이 참 많다. 위안부, 제노사이드와 같은 무거운 주제, 혹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는 주제는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깊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자신이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학문의 공간임에도 각자도생을 하려는 다른 이들의 모습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다른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인권과 평화>는 과제량이 800 자라고 한다. 2,500자인 우리와는 제법 차이가 난다. 그러나 800자 안에 그 많은 내용과 배움을 담을 수 있는가(배우는 주제는 각각 다르다.)? 난 아니라고 본다. 당장에 나 역시 강의시간에 제대로 듣지 못한 내용을 요약, 쟁점을 제시하는 경험을 통해 되새김질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나와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고 내 삶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은 말과 개념으로 세상을 짓는다고,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여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비로소 세상을 직시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정치, 근현대사 분야를 새롭게 접하며 가치관을 확립하는 경험을 하는 게 나중에 얼마나 큰 자산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시선을 확장하는 것은 <인권과 평화> 뿐만이 아닌 다른 수업에서도 매한가지로, 성숙한 인간 된 삶을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1학년 때 세상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히 필수 수업이라 말할 만하다. 이러한 강의의 주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불쾌함이란 화폐로 배움을 교환하려 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면 그렇게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인권과 평화라는 가치를 나의 삶에도 담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다름과 비판적 사고>- 배성인 교수님

비판적 사고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힘이라고 배움터길에서 배운 것 같다. 자신의 관점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론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시선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름을 이해하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민주시민의 자질을 키워나가는 것. 그게 이 수업이 가지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교수님이 열려 있는 분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시고, 무엇보다 본인이 기성세대 범주에 속하는 사람임에도 사회갈등을 청년들의 관점으로 분석해 주시며 기성세대라는, 억압된 분노의 형태를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 주시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수업을 일찍 끝내주셔서 좋았지만, 가면 갈수록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향된 게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해 살아가는 것이 밑바탕에 둔 관점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교수님의 수업을 재밌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 학기에 느끼는 거지만, 나는 교수님을 만나는 운이 참 좋은 것 같다. 교수님이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생각을 접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이번 학기, 그것을 확실하게 느낀 수업이 <다름과 비판적 사고>였다. 물론 학기 초 아무것도 모를 때는 노트북으로 카톡을 하며 맥락과 관계없는 내용을 필기하기 바빴지만, 배움의 폭이 커지니 수필로 필기하면서도 교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대학 수업인 만큼, 내가 흐릿하게 알고 있는 용어가 많이 나왔고, 무엇보다 거의 모두가 질문하지 않고 시간 때우기 바쁜 수업의 특성상 흐름을 한 번 놓치면 따라가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기초지식과 관련 없는, 배움을 흥정하려 하는 사회체제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크게 여의치는 않는다. 다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러한 사회체제의 부산물을 알고 있는 내가 그 문화를 바꾸는 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모르는 게 있으면 먼저 질문하고,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태도가 나에게, 아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이러한 고민을 던져주고, 환경을 조성해 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드는 지금이다.


사실 수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헷. 사. 문>과 유사하다. 다양한 사회문제를 들고 그것의 사례와 각자의 시선, 그리고 해결방안을 함께 나누는 수업인데, 교양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그런데 결론은 비슷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두루뭉술하고 진부할 수 있어도 이것이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임에는 틀림없다. 가난한 이들이 연대하여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 파시즘의 전조 증상인 정보 날조와 주입을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필요한 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유하는 비판적 사고다.


나는 이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자문해 본다면 티미와 아하가 이야기한 기본소득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 확립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불평등은 결국 누군가가 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왔을 수밖에 없고, 우리 사회의 부는 축적되어 넘쳐난다. 숫자로만 존재하는 부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넘쳐나는 부를 모두가 고르게 가질 수 있다면, 그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나는 경제성장에 반대하지만) 기성세대가 말하는 경제성장을 꾀할 수 있다. 이뿐이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들이 금전적인 지원을 받음으로써 사회에 미래를 믿고 맡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활동가들의 움직임은 다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선에서 올 것이다. 내가 들은 수업들이 모두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만큼, 결론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그 기틀을 확실히 하여 추후의 배움에 영향을 준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박경태 교수님

과장 좀 보태면 이 수업 때문에 수요일이 기다려졌다. 사회학 전공을 희망하는 나로서는 수업에서 다루는 사회문제에 대해 학우들, 교수님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강의방식과 격주로 작성하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글을 통해 나의 언어로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만 <헷. 사. 문> 강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오전 9시 수업이어도 생기가 넘쳤고, 교수님도 강의만 하시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생각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려 하는 좋은 분이셨다. 배움이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우치다 타츠루가 이야기한 바 있는데, 수요일 9시의 나는 항상 배워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업의 영향인지, 아니면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인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넓어지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능숙해진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스스로 기뻤던 기억이 난다. 이전부터 글을 써왔지만, 사회문제에 대해 심층 깊게 다룬 글은 보기만 했지 써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러 학술자료와 단행본을 비교분석하여 나만의 생각을 정리해서 쓴 글을 통해 생각의 확립을 이루었나 싶기도 하다. 특히 자료로 많이 사용한 『녹색평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불과 1년 전의 나는 『녹색평론』의 언어가 잘 와닿지 않았다. 지식이 부족했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보니 거리감을 느낀 것 같다. 그런데, <헷. 사. 문>을 수강하며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고, 종국적으로 글을 쓰는 과제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자료를 찾아보게 되니 『녹색평론』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실제로 그랬다. 생태문명에 기틀을 둔 글들을 통해 사회체제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을 기르고 있던 나는 그것들을 글로 녹여내며 한 뼘 더 자랄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스스로가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고 나만의 사유를 통해 완성한 글의 가치는 두말할 필요 없지 않은가. 기말보고서에는 한국사회의 교육신화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마을공동체를 제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헷. 사. 문> 파일을 모두 열어보니 그동안 쓴 글이 전부 산업문명을 비판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글들은 조금씩, 조금씩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보인다. 미래의 내가 되어 과거의 나를 바라보니 뿌듯한 생각과 함께 욕심이 난다. 아직 1학년인데,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글을 읽고 써야겠다는 다짐 역시 하게 됐다.


사회문제를 들여다보는 수업이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사회에 속한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고 내면을 성숙하게 만듦으로써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자랄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 준 수업이라고 느낀다. 근간이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나의 시선으로, 나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읽으면 될 것 같다. 사회학은 결국 사회의 불편한 환경과 시선을 바꾸기 위해 탐구하는 학문이지 않은가. 교수님은 “사회학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공정담론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걸로 보인다. 올바르게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원천은 용기고, 용기는 연대에서 나온다. 연대의 사회학을 통해 손을 잡고 다 같이 발걸음을 딛는 사회가 찾아오길 간절히 희망해 본다.



실패할 수 있는 기회, 다가치학교

올해 4월부터 진행한 외부활동. 안전한 배움의 공동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청소년들이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청소년들과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조금 더 자라나는 코디네이터들의 모습까지.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환대가 넘치고 사람이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활동하게 됨에 너무나 감사하다. 나는 다가치학교라는 공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배움터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코디네이터 연수 ppt에서 보았던 이반 일리치의 말뿐만이 아니라 우정과 환대, 공동체정신과 같은 내가 자주 쓰는 언어들이 다가치학교에서도 쓰였다. 괜스레 반가웠고, 내가 이곳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제대로 활동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이 공동체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배움터길과 같은 공동체가 또 있었다. 각자의 빛을 내기 위해 애쓰는 아이들, 아이들과 함께 빛나기 위해 고민을 나누고 그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코디네이터들의 모습이 기억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다.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이 이념적으로도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이었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존중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다가치학교라는 공간이었다. ‘다 같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나가고자 애쓰는 구성원들과 나를 보며 사회에서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살에 좋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여기서 청소년(이하 꾸리)들을 만나는 코디네이터들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가며 마음껏 실수하고 실수를 발판 삼아 더 넓은 세계로 향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상호 간의 소통을 매개로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되어 성숙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게 다가치학교의 가치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내가 다가치학교에서 코디네이터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약 1년이다. 1년 중 3개월가량을 보냈으니 1/4 정도 왔다. 그런데 벌써 이곳에 정이 들었다. 나 역시 결국 사람들을 좋아하나 보다. 우정과 환대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 숨 쉬니 금세 매료된 것 같다. 내게 너무나 익숙한 분위기의 공간과 사람들, 나의 진로와 결이 비슷한 활동, 불완전한 나라는 존재가 청소년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불완전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들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묘했다. 청소년들을 만나는 입장이면 완전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내가 그들을 만나며 나로서 존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가 모르는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칭한다면, 내게 있어 그 가치는 ‘다 같이’. 즉 함께인 것 같다. 함께 발맞추어 나가며 연대하는 삶. 내가 살아오며 가장 중요하게 여겨왔던 가치들을 다가치학교에서 새롭게 정립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다가치학교에서 활동하는 시간 동안 더 많은 걸 배우고 싶다. 내게는 실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마음껏 넘어지고 실수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코디네이터로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이때를 뒤돌아봤을 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마치며: 나, 그리고 인간관계

어느 곳에 가도 인간관계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환경적 요인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나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관계를 맺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기준이 너무나도 많고 저마다 다르다. 그런 와중에 좋은 사람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 좋은 사람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느 것 하나로 특정하긴 어렵지만, 나와 이념적으로 맞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그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고, 정치적 견해일 수도 있으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흐릿하게나마 이렇게 생각해 오던 한 학기가 지나고 뒤를 돌아보니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 배움의 공동체를 꾸린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념적으로 잘 맞는 사람들인 만큼 서로의 고민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이들 옆에 있으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1학기였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 같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옆에 있어준 모든 이들 덕분에 20살 나의 몸과 마음이 더 자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다 보니 대학에서 만나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관계가 형, 누나들이었는데, 나보다 삶의 흔적이 더 긴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있었던 나는 삶의 경험을 나눠준 이들 덕분에,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들 옆에서 지낸 덕분에 더 자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들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책에서 깨닫는 게 아니라 길에서 깨닫는 게 진리다.”라는 말처럼 삶의 결론은 책에만 있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 맺으며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인간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끝없는 자기검열을 하고, 경쟁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갉아먹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 활동들을 해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경쟁교육체계를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자라온 내가, 환경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살아오며 지켜온 소중한 가치를 잊을 뻔했으니 말이다. <인권과 평화> 강의 회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밥 먹듯 출튀를 하고 배움을 흥정하는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렇게 글을 쓰는 나는 없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도 학기가 지나고 쉼을 가지는 지금 뒤를 돌아 큰 목소리로 1학기의 박민찬을 불러보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색다르고 새로운 경험,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며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아직 미완성이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것 같다. 1학년 2학기를 준비하는 나에게 남은 7학기가 어떨지는 지내봐야 알겠지만, 배움의 공동체에서 좋은 이들을 만나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걸음은 비틀거릴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비틀거려도 나를 잡아주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이들이 있다면 그걸로 됐다. 다른 이와 연결될 때 비로소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존재감을 보이려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한 삶을 살아갈 나를 다독이며, 동시에 미숙하고 서툴렀던, 그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자 앞으로 나아갔던 지난 나에게 연극 『삼매경』의 대사를 빗대어 말해주고 싶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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