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수업 쪽글
기계에게 대체 당할 것인가?
코로나 이후였던가. 인간의 삶이 기계에게 대체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화상으로 수업이 진행되기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게 사람이 아닌 키오스크로 변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학교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돼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며, 직원들은 손님을 마주하지 않고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거나, 반대로 손님은 직원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고 손놀림 몇 번으로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편의를 주는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점점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그리고 백 번 양보해 이러한 현상을 기술발전에 따른 편의라고 해도, 편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 돌아본 적 있는가? 이번 글에서는 우리 삶에 찾아 들어온 안락과 편의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보다 그것의 혜택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변모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든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통렬히 바라보며 연대하고자 하는 삶을 호소하고자 한다.
기계가 인간의 삶과 사고를 대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기술이 주는 안락과 편의에 갇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말로는 대체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대체 당하는, 기술문명에 굴복한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인간상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안락과 편의를 누리기 위해 개발하는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거기서 소외되는 대상은 누구인지 이야기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문명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우리 삶에서 기계를 찾지 않는 게 더 어려워졌고, 수많은 정보가 떠돌고 과장된다. ‘시대가 변화하는 게 과연 좋은 것인가?’, ‘우리가 무언가를 잊고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는 지금,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손을 뻗어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기술과 제도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현대를 살아가는 노인인 다니엘 블레이크(이하 다니엘)가 기계화된 현대 체계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다니엘은 심장병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찾아간 관공서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복잡한 절차를 요구한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복지제도의 폐해를 다루고 있으나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을 위해 개발된 기술을 과연 인간 모두가 누리고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실제로 다니엘은 노트북과 컴퓨터를 처음 접하다시피 한, 그래서 능숙한 이들에 비해 훨씬 느릴 수밖에 없는 노인임에도 사회는 그에게 똑같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노인이 무조건적으로 느린 건 아니지만, 작품을 통해 켄 로치 감독은 기술의 편의를 강조하고, 그것을 서민들이 누리게 하는 걸로 착각되기 쉬운 공권력이 삶을 연필과 글로, 그리고 일로써 표현해 온 노인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현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나누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권력은 다니엘이라는 노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는가? 아니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감정의 교류를 나눴는가? 사회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매몰차게도 그를 받아주지 않고 체제의 구렁텅이로 그를 끌어내렸다. 다니엘이 지원금을 받고자 찾아간 센터는 융통성 없이 제도와 절차만을 요구하며 사회체제에 발맞추어 살아가기 힘든 다니엘을 버렸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숫자로, 화면 속 점으로 존재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사회가 버린 다니엘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었다. 다니엘이 그래피티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현대의 공권력, 복지제도의 모순을 통렬히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의 외침은 자신이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걸 알리고자 하는 저항이라고 말이다.
현대의 기술은 사람들에게 안락과 편의를 가져다줬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안락과 풍요를 가져다주었는지 반문해 보면 그건 또 아니지 않은가. 앞에서 언급하였듯 다니엘과 같은, 상대적으로 기술의 편의를 늦게 접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기계가 주는 편의를 누리고 있던 공권력의, 다시 말해 센터의 직원들은 인간 자체가 기계화된 지 오래였다. 절차와 제도를 따지며 인간성을 상실한 걸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기계가 주는 편안함에 잠식되어 버린 인간을 나타내는 듯하다. 즉 기술과 제도는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는 기계를 만들어 낼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도 다니엘은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세계의 밖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외침이 우리 가슴에 와 닿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 역시도 해본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이 들어오고 공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그리고 자본이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니엘은 항고일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권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의 장례식 역시 ‘가난뱅이’ 장례식이라는 불명예를 쓴 오전 9시에 진행된다. 여기서 케이트는 다니엘이 항고일에 말하고자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니엘은 인간이었다. 세상의 자본논리로 점철된 기계가 아닌 진정한 인간이었다. 국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국가가 국민을 버린 것을, 기술의 혜택이 모두에게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보았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논리가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어 진정한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우리 곁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로 치닫는 지금, 노인을 위한 복지제도는 역설적으로 노인이 손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제도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존엄성에 대하여,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인지에 대하여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다니엘 블레이크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사랑이 없는 세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주부 신애는 "우리 모두 난장이예요"라고 말한다. 이는 관계가 단절되고 연대의 정신이 없다시피 한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껴진다. 사회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단절로 인해 이들은 영수가 말한 것처럼 천국에 살며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 부유층들과 달리 지옥에서 살며 하루하루 천국을 생각하며 삶을 버텨낸다. 영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지옥과 천국처럼 단절적으로 보고 있으며 세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투쟁하려 한다. 더 이어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행복과 사랑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고 우주로의 이주, 즉 현실 도피를 하게 되지만, 시공간적 초월은 불가능하기에 이런 사실에 절망하며 현실에 발붙일 수도 없는 인물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미뤄 생각해본다. 영호를 대상으로 던진 "형은 이상주의자야"라는 말의 ‘이상주의자’는 현실과 싸우며 그 현실을 바꾸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 '죽은 땅'에서 낙오돼 세계를 부정하고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이상)에서 삶의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을 칭하는 말로 보인다. 영수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그나마 영수는 교회와 노조를 이용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바꾸려 노력하기도 하며 폭탄을 만들어 재벌 총수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취소하는 등의 이성적 면도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영수가 살고 있는 땅은 죽은 땅이기에 이러한 실천은 의미가 퇴색되었다. 영수가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라고 단정 짓는 장면에서는 아련한 분위기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난장이의 첫째 아들인 영호는 대학생 지섭에게 "나는 도도새다."라는 말을 듣고 근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알다시피 도도새는 인간의 미개지 훼손으로 180년 만에 멸종한 새이며 날개가 없어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사회적 힘이 없는 처지로 투쟁하는 지섭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로 보여진다. 사회체제가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맞서지 않는다면 도도새처럼 멸종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도도새는 날개를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도도새는 날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고 이는 곧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도도새가 아닌 같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힘이 없는 도도새들이 투쟁한다. 즉, 기계화 된 세상에 맞서 투쟁하는 다니엘 같이 인간 된 삶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기계화가 답습된 세상에서 법은 그들에게 있어 하등 쓸모가 없다. 첫 장면인 판자촌 철거 소동은 이런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판자촌을 철거하며 주민들에게는 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지지만 아파트에 갈 돈이 없어 판자촌에 온 사람들을 대신해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와서 돈을 번다. 그들은 법을 강조하며 이럴 때의 법은 기득권자를 위한 도구로 쓰인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는 난장이의 말이 이렇게 처절하게 들릴 줄 생각조차 못했다.
작품을 통해 보았을 때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보듬어 품고자 하는 박애정신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세대가 다르다는 것은 곧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관념을 버리고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 채 공생공락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공권력이 다니엘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곧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를 기계로만 바라보고 획일화 된 인간 중 하나이길 바랐던 공권력의 복지제도는 다름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기계로만 바라보는, 전태일 열사가 이야기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작품 속에서 지섭은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고 말한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묘사한 작품이 어쩐지 현대와 닮아 있다.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기술문명에 기대어 획일화 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과 다른 시대를 살아갔다고 남을 마음껏 배제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원초적 거부감을 건드리며 함께 살아가자고, 우리가 왜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냐고 짙게 호소하고 싶다.
참고문헌
켄 로치.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조영래. 2009.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조세희. 1978.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