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기술, 사라진 인간성, 그리고 자유

<간디의 물레>- 김종철

by 박민찬

인간소외, 인간성의 망각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 인간이기는 할까? 4차 산업혁명 이후 초연결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정, 사랑, 희망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 덕성을 유린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인공지능에 대해 왜인지 모를 거부감을 느끼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안 쓰면 바보라고 취급받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아직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남아 있다면 그건 인공지능을 포함한 과학기술이 우리의 인간성을 망각하게끔 설계되었다는 것을 통렬히 깨닫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려는 인간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흔히 과학기술 발전의 부작용을 그린 공상과학 소설의 줄거리가 우리에게 곧 닥칠 미래인 것 마냥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에서 보듯 과도한 산업화 이후를 다루는 디스토피아 창작물의 줄거리 대부분이 인공지능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구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의 창작물이 단순 재미에만 초점을 맞춘 게 아닌, 즉 사회에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이러한 구성은 지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이야기의 흐름은 기술이 집약적으로 발전해 자아를 갖고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내용이 주된 것이지만, 사회의 흐름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며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자본의 논리가 인간에게 스며든 게 지금의 사회구조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해 보면 산업화 이후 근대가 개막하고, 자본주의가 도래함에 따라 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다른 기업과 경쟁해야 했고 경쟁논리는 자본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수많은 인간소외와 사회문제를 낳았다(산업혁명 이후 아동노동과 같은 사회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멈출 줄 모르는 과학기술 발전의 미래를 그리는 소설이 단순히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다면 우리는 이에 의구심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닌, 인공지능과 기술을 통해 편리함을 느낀 이들이 그것이 있기 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망각의 상태에 놓여 인간성을 상실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가 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기 2540년, 작중의 사람들은 욕망과 자극만을 원하며 사유하지 않고 살아간다.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인간이 인공수정으로 태어나고 어떤 삶을 살지 정해져 있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부품이 되어 살아가고, 기술을 통해 계급이 나뉘고, 욕망만을 추구함에 따라 개인의 주도성과 자치가 보장되지 못하는 기술전체주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닌, 자본을 등에 업은 기득권자들이 대중의 인간성을 망각하게 함에 따라 기술(소마로 묘사)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들로 재단하려는 추악한 손길이다. 과학기술은 탄생과 동시에 공동체를 파괴하였으며, 기득권이 내세우는 편리와 효율성이라는 단어 역시 자본주의의 특성인 저비용 고효율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기술이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과 연대에서 편리와 효율로 인간의 삶의 가치가 바뀐 지금, 내가 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인간이기는 할까?”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기술은 결국 진리를 숨긴 허상일 뿐이다.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환상의 대부분은 ‘편리’와 ‘효율’로 이루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열광하지만, 정작 그 기술은 인간이라면 감내하고 살아가야 하는 ‘불편함’과 ‘느림’을 배제하곤 한다. 더 나아가, 기술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일천하에 드러난 지 오래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즉 자연생태계의 본질인 순환의 일부인데도 산업화를 목표로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삼으며 종교적 감수성, 여성성을 망각한 이들이 자연의 기본적 순환원리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모든 문제는 산업화의 무리한 추진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자본주의적인 산업화뿐만 아닌 산업화 그 자체가 근본문제라는 관점으로 인간성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이다. 즉 편리와, 효율이라는 기술을 대변하는 단어는 결국 인간성을 망각한 인간들이 두려움을 대신 내세우는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기술 자체를 경계하지,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술을 손에 업은 자본이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조작하는 기술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할까 무섭다. 무인시스템, 키오스크, 비대면과 같은 기술은 늘 사람을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우리 곁에 스며들었다. 사람을 배제시킨다는 건 앞에서 말한 인간성의 상실이다.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덕성이 철저히 유린되고 있으며, 소비주체로 자라난 현대의 인간은 편리와 효율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채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곤 한다. 기술과 자본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없앤다. 우리의 인간성을 기술이 빼앗아 갔다는 주장은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이에게서 나오는 언어다. 기술이 필요하다고 세뇌한 자본과 자본논리를 용인하는 사회가 앗아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본에는 너그러우나 배제되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하다. 지난 12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해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역설적으로 그동안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기술은 그동안 발전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덜어주고 고민할 필요를 제거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찬양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참다운 사람이 되려면 고통과 고민 없이는 안 된다는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려 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



생태적 상상력과 가난

김종철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눈부신 기술이 아니라 인간생존의 근원적인 바탕을 늘 잊지 않게 해주는 인문적 지혜와 종교적 감수성”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을 생태적 상상력이라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거칠게 정리하는 생태적 상상력이라 함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 존중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내면적인 성숙을 목표로 하는 사상일 텐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문적 지혜는 다른 이를 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자는 삶의 기본적 토대일 것이며, 종교적 감수성은 작은 것에도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사회진보를 외치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가짜 진보’와 산업문명에 비판을 가하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세계관 안에서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게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나는 김종철 선생님의 글과 좌담이 담긴 『간디의 물레』를 꽤 오랜 시간 나눠 읽으며 1999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도 그 언어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당시에도 굉장히 급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너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평가가 잇따랐을 텐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산업문명이 가져다주는 풍요의 허상, 생태계의 재난,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는 지금의 우리가 더욱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급진적이라는 것은 한 발짝 멀리 가 있는 것을 뜻하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도 『녹색평론』을 비롯한 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가치가 그저 ‘뜬구름’으로만 치부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책에 담긴 김종철 선생님의 절박한 호소가 눈이 아닌 가슴으로 읽히는 까닭은 나도 조금이나마 생태주의라는 가치관을 품 안에 담았기 때문 아닐까.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대안은 더 많이 가지고 더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을 절제하고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을 선생님께서는 ‘가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대부분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만 같다고 여기는 가난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얼핏 보면 놀라움을 넘어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가난이야말로 자기의 이웃이나 자연과 사랑을 토대로 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며, 풍족하게 살며 자신만 배를 불리는 게 아닌, 욕망을 절제하는 것에서 나오는 기쁨을 느끼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선생님의 말씀을 토대로 떠올려 보면 이는 『월든』을 쓴 핸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생활과 궤를 같이 한다. 월든 호수에서 살아가며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자급자족하던 그의 생활양식은 김종철 선생님이 주창하신 ‘고르게 가난한 사회’와 닮아 있다. 자신의 풍요로움이 어딘가의 결핍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깨닫는 감수성을 토대로 문명이 주는 안락함에 거부하며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나눔, 자급자족의 진리를 실현하는 삶이 소로우의 삶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연대정신이 필요하다. 마음만 넉넉하면 결코 굶주리지 않으며, 가난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남들과 나누는 게 좋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팽창하여 돈이 생존의 밑바탕이 된 사회에서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렇다. 당장에 나조차도 대학에 들어가 학점경쟁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물론 학점경쟁을 하는 목적은 다 다를지라도 밑바탕에는 경쟁을 해서 남보다 높게 서 있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주장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아이러니함을 예측하신 걸까. 김종철 선생님은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일 것”이라 말씀하시는 동시에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우리가 살아남고, 또 사람답게 살려면 탐욕과 사회적 갈등을 끊임없이 부추기면서 인간 심성을 끝없이 피폐시키는 산업주의적 생활에 단호하게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인즉슨, 보다 급진적인 자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결국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생태적 상상력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성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이라고 짐작해 본다.


결국 생태적 상상력이라 함은 욕망을 절제하고 세상을 달리 보는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남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보란 듯이 뽐내려는 욕망을 절제하는 단순 소박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적 감수성과 인문적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도 결국 세계의 일부임을 자각하여 만물이 하나라는 진리를 깨달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신 가난과 생태적 상상력은 결국 자신의 유한함(취약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을 인지하고 서로 도우며 공생하는 삶을 지향하는 태도이자 방향성이다.



급진적으로 존재하려면 – 나의 한계를 넘어서

대학생활을 1년 간 하며 느꼈던 사실은 시대가 너무나 빨리 변해감에 따라 인간소외 역시 가속화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텍스트 너머로 보던 대학과 실제로 생활한 대학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당장 생성형 인공지능만 보아도 처음 출시되었을 때만 해도 배움의 공간에 인공지능이 침투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나, 이제는 안 쓰면 바보인 시대가 되었고, 사유하고 사회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문화가 축소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산업문명을 비판하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고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혼자 비틀거리며 걷지 않기 위해 진학한 학교라는 공간도 종국적으로는 사람을 평가함에 따라 산업사회의 예비군으로 만들고자 하는 본질을 지녔으며,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의 부품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후에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를 다루며 얘기해 보겠다.). 비판적 상상력을 어느 정도 가졌다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이 공간 안에 속해 있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배움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자 삶의 일부지만,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할 배움의 과정에 제도적인 평가가 들어가게 되면 인공지능과 같은 산업문명의 부산물 – 인간성을 망각하여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혁신’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 을 도구화시켜서 성적향상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더욱 경계하지만, 나라는 인간도 결국 성적을 잘 받고야 말겠다는 욕망에만 충실하지는 않았나 되짚어 보게 된다. 아직 사용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으나 어쩔 수 없으니 사회에 순응하고 살아가라는 주위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요즘이다.


나에게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살라는 주위의 말이 나쁜 뜻이 아닌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사회에서 뒤처지거나 낙오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충고했을 것이랴. 그러나 아직까지 나에게 인간성이 남아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산업사회의 병폐에 예속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내게 주는 사랑은 사랑으로 받되, 조금은 고집을 부리고 싶다. 이제야 말하지만, 굉장히 어렵고 한편으로는 외롭기도 하다.


지금 특수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그것을 더욱 실감하는데, ‘근로장학생’의 신분으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인 만큼 아이들에게 온전히 진심을 쏟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돈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이상 머리로는 욕망을 절제하고 만물에 대한 사랑을 품겠다는 나의 신념은 그저 돈을 벌고 빨리 집에 가려는 ‘불쾌함’이라는 화폐로 치환되고 만다. 우치다 타츠루가 『하류지향』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산업화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소비주체로 길러짐에 따라 인간성을 망각하고 자본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 나 역시 이 체제에 연루되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허망함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산업화 이후 사랑과 연대를 상실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취약한 우리가 상호돌봄을 통한 연대를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김종철 선생님이 갈파하셨듯, 물질적 편의와 풍요의 달성을 위해 우리가 갖고 있던 중요한 인간가치를 외면하였기 때문에 공동체적 연대를 상실하고 자기중심적인 고립 속에서 경쟁과 투쟁이라는 살벌한 생존방식에 매달렸던 것이다. 자본논리를 비판하면서도 그 안에서 존재했던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게 그저 자기연민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나는 이때 여성성이라는 우리가 잊고 있던 감수성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일하는 곳의 돌봄선생님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것과 페미니즘 공부를 하며 느낀 배움을 엮어보면 여성들이 흔히 맡고 있는 돌봄이라는 일은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라는 점 말고도 상기할 만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산업사회가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구조인 것에 반해 여성들의 일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데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성 역시 내가 망각하고 있던 덕성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삶에 『간디의 물레』를 녹여내는 과정은 앞으로 생태주의라는 가치를 통해 삶을 일궈나갈 나에게 있어 걷기 힘든 가시밭길이기도 했다. 김종철 선생님의 글은 나에게 산업문명을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계속해서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나 역시 김종철 선생님이 제기하신 산업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잊고 살았던 여성성을 생태적 상상력과 결부시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이렇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남들과 달리 특별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유별나게 똑똑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내지는, 아직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에 맞서는 인간, 자유인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고 배움을 넓혀가는 지금도 김종철 선생님의 언어가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스며드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처해 있는 생태적 위기가 절박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틀인 공동체가 점차 쇠퇴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보다 다르게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사회가 불러온 자본논리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생공락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욕망에 맞서 마을에 뿌리내려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생겼다. 혹자는 그저 이상으로만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더라도 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김종철 선생님의 글이 가슴으로 읽힌다는 표현을 했는데, 우리가 처해 있는 기후, 생태적 위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이 만물의 어머니라는 종교적 감수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디의 물레』는 생태주의가 아직 낯선 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산업문명의 필요를 근원적으로 묻고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생태주의라는 사상 자체가 인간의 개발로 인한 자연의 훼손에서 대두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자신이 내놓은 쓰레기에 묻혀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책을 집어드는 것은 어떠한가. 산업문명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더불어 대안으로 제시하는 가난과 마을이라는 가치는 지금 사회에 너무나 필요하다.


그 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거대기술, 즉 인공지능이 아니라 불편함과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가려는 인간의 원초적 삶의 양식,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해 남 위에 군림하려는 남성성이 아닌 생명을 보살피고자 하는 여성성, 어딘가의 빈곤을 부르는 풍요가 아니라 공생공락하려는 가난, 마지막으로 자연을 비롯한 만물을 자신으로 여기고 서로의 삶을 넘나들고 물을 수 있는 사랑이 우리가 진정으로 지녀야 할 가치라는 말을 해본다. 즉 우리가 그동안 수용하며 살아온 삶의 태도에 근원적으로 물어야 하며, 옆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의 물레』를 접한 이들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라면, 아직 거대기술이 삶에 스며드는 것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남아 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으면 한다.


사실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거대기술이 주는 망각에 저항하려면 결국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려야 하고, 우리는 그것이 비효율적이고, 편리하지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은 넉넉해도 걸어가는 길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이유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간디는 스스로를 이기적인간이라 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을 도운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라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게 아니라 남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둔 삶을 산 간디를 책에서 인용한 김종철 선생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산업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공생공락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잊은 채 서로의 삶을 넘나들지 않으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허상에 빠져 있다고 말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을 빌려 다시 강조해 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남들과 나누며 살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공생공락이라는 인간성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수반되어 있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간정신이 아닐까.


내 대학생활 1년, 정확히는 『간디의 물레』와 함께 한 가을겨울은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산업문명의 혜택에 거슬러 올라가는 발걸음은 고독하기도 하다. 그러나 『녹색평론』, 『간디의 물레』 덕분에 가는 길이 어둡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띄엄띄엄 읽은 감이 있으나, 오히려 긴 호흡으로 읽었기 때문에 세상의 자본논리에 굴하지 않으려는 인간성을 굳히는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는 회고를 해본다. 이제 나는 불평등한 사회의 논리에 저항하며 자주적인 삶을 그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은 그것을 ‘자유인’이라 말씀하시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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