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치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
“이반 일리치가 갈파했듯 우리 사회의 교육은 의료를 비롯한 여러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율성을 옥죄는 도구죠.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 게 아니라 도구로서 산업사회에 복무할 자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오히려 강화됐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4월, 나의 선생님은 공교육과 배움터길이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다른지 묻는 질문에 대답하시며 이반 일리치라는 익숙한 이름을 꺼내셨다. 우정, 희망, 사랑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덕성에 기대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현대의 제도화된 시스템을 비판한 사상가 이반 일리치. 그 익숙한 이름이 나를 『학교 없는 사회』로 이끈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리치는 책에서 ‘학교화된 사회’라는 말을 통해 서구의 산업문명에서 파생된 제도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이를 풀어보면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은 사람을 소비중심 사회로 끌어들이고 그 안의 부품이 되게끔 조작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체제의 노예가 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산업사회의 예비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학교화된 사회의 가치는 오직 수량화된 가치이며, 학교는 모든 것의 가치를 수량화할 수 있는 세계, 즉 우리의 상상력은 물론이고 인간 자체까지 측정할 수 있는 세계로 인간을 유혹한다. 리 호이나키는 이것을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라고 표현하며 인간 스스로가 고통과 고민 같은 삶의 과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고 오직 제도가 주는 편리함에 잠식당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리 호이나키와 이반 일리치가 서로의 삶과 우정을 나눈 벗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호이나키가 병원의 제도로 인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던 이유 역시 일리치가 학교라는 제도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라 짐작해 본다. 즉 일리치, 호이나키는 학교와 병원 같은 현대의 제도들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직 체제에만 순응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결국 삶을 위한 배움임에도 학교라는 제도는 학생들에게 측정할 수 있는 수량화된 가치를 주입함으로써 주어진 규격에 맞게 살아가게끔 세뇌시킨다. 주어진 규격에 맞춰 학교화된 사람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측정되지 않는 경험’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만 가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한다거나 자신이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측정할 수 있는 수량화된 가치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산업사회의 예비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근대가 도래함에 따라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삶의 양식이 더 나아졌다는 어리석은 가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산업사회의 제도의 포섭되어 자기주도적인 삶을 그리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건지 일리치는 현대 사회에도 맞닿는 대단한 통찰을 보여준다.
“가치가 인위적으로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학교로부터 주입받은 사람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받아들이기도 쉽다. 단일한 척도로 국가 발전을 가늠한다든지, 아기의 지능을 측정한다든지, 심지어 평화를 향한 전진을 전사자 수로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화된 세계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모든 길이 소비자 지표로 포장되어 있다.”(이반 일리치, 1970: 92)
위에서 보듯 이반 일리치라는 사상가가 근대의 제도화된 시스템에 급진적인 비판을 가한 것과 더불어 무조건 멈춤이 아닌 뒤를 돌아보고 우리가 잃어버린 측정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찾자고 수차례 얘기한 걸 떠올려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행복이라는 가치는 결코 수량화되어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소비 중심사회의 자본논리는 측정 불가능한 가치조차 수량화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뒤에서 나올 배움과도 이어진다. 배움의 아취 있는 가치는 결코 측정할 수 없고,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근대의 학교시스템은 현행 제도와 맞물려 가치를 수량화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앗아가고 있다는 걸 이반 일리치는 일찍이 갈파하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인간이 날 때부터 소비주체로 길러져 배움을 흥정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일리치와 엮어보면 소비주체로 길러진 인간은 자신이 학교가 판매용 상품으로 내놓은 지식의 소비자인 양 착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제도에 의해 소외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일리치가 언급한 전통적 의미의 소외가 ‘일이 임금노동으로 변해서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하고 스스로 재창조할 기회를 박탈당한 데서 일어나는 결과’라는 걸 떠올려 봐야 할 필요가 있을 텐데. 학교는 삶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소외를 연습시키며 교육으로부터 현실을 제거하고, 노동으로부터 창조성을 앗아간다. 또한 학교는 가르침 받을 필요를 가르침으로써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소외시킬 제도화에 적응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학교라는 제도가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산업사회의 부품으로 작동하게끔 한다는 사실을 갈파한 일리치의 통찰이라 볼 수 있겠다. 나 역시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배움을 이어가고 있으나 현대의 문명이라고 떠받들어지는 수많은 기술은 자유를 향한 발걸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던 소중한 관계는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우리의 삶이 제도 속에 포획된 디지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을 예견이라도 한 것인지 일리치는 『우정에 대하여』라는 담화에서 “우리는 발의 사용가치를 제거해 버렸”다고 말한다. 이 말인즉, 학교와 같은 제도에 포섭된 인간들은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병원에 가야만 병을 고칠 수 있으며, 차 없이 이동하는 건 꿈조차 꾸지 못한다는 걸 내포하지만, 이것을 현대로 들고 와 보면 인공지능과 같은 이제껏 목도하지 못한 기술의 혁신이 사실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제도와 맞닿아 인간의 자립적인 행동과 경험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내 손으로 무엇 하나 해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직 접하지 못하였으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는 일리치의 또 다른 저서는 아마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즉 학교화된 사회는 학교뿐만이 아닌, 근대 이후 대량 생산과 소비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산업체제에서 나온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조직하는 제도라는 말이 된다. 일리치는 ‘주어진 자원은 희소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희소성 법칙을 인간의 본질을 물으며 비판한다. 인간은 최소한의 도구를 만들어 스스로 땅을 일구어 삶을 영위하는 존재였으며, 자연은 적절한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혜택을 베푸는 터전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갈망하는 ‘필요’란 산업체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를 위해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덧씌운 것이다. 제도에 의한 필요의 경제는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 곧 자연의 혜택에 의지해 자립적인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앗아가는 시스템인 셈이다. 제도는 우리를 소비사회에 입각시켜 자유를 빼앗고 있었으며, 학교화된 사회는 이를 학교라는 근대 제도의 폐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일리치의 통찰이라 보면 되겠다.
현대화된 빈곤
학교화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전, 현대화된 빈곤이라는 말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본래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현대화된 가난’이라는 말을 쓰지만,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가난이 사람이 비참하게 되는 빈곤의 상태가 아닌, 풍족하게 사는 것보다 청빈하게 생활을 절제하는 데서 정신적인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을 뜻하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나는 ‘가난’ 대신에 ‘빈곤’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일리치는 자급자족의 능력을 잊은 사람들이 현대의 상품과 서비스마저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을 현대화된 빈곤이라 칭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진정한 인간이라면, 이전보다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삶은 결국 어딘가의 결핍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산업사회 이후 인간 사회가 더욱 풍요로워진 것은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풍요로 인해 자연이 고갈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인간은 최소한의 도구를 만들어 자급자족하였으며, 자연은 적절한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혜택을 베푸는 터전이었지만, 산업화 이후 필요의 경제에 의해 욕구에 굶주리고 자급자족의 능력을 빼앗긴 인간들이 산업사회의 부품이 되어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사회는 너무나 풍요로워졌지만, 역설적으로 너무나 빈곤해졌다. 산업화, 기술의 발전에서 나온 온갖 제도로 인해 사람들의 자주성은 사라지고 오직 더 많이 갖겠다는 욕망만 남아 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는 지섭의 말에서 보듯 우리는 자급자족과 가난의 미덕을 떠올리지 못한 채 회색빛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현대화된 빈곤을 안겨주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던 정겨운 삶의 방식을 꿈꾸지 못한 채 대량생산과 소비로 자연을 끝없이 낭비하며 사람들은 자연을 직접 이용할 수도, 상품을 통해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조차 없는 역생산성의 효과 때문에 아무리 필요를 충족해도 사람들은 걸신이 들린 듯 좌절과 불안이라는 빈곤의 상태를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타율적으로 개척해 가지 않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의지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인간이 제도에 의존하여 공동체보다 개인의 사욕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현대사회의 빈곤, 다시 말해 현대화된 빈곤은 산업사회 이후 만들어진 제도와 기술에 의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겠다. 제도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기술은 우리를 초연결 시대로 데려다주지만, 우리는 막상 서로의 얼굴을 맞대지 못하고, 문지방조차 넘지 못한 채 오직 스크린으로만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일리치가 지적한 ‘학교’라는 제도와 연결 지으면, 학교 교육이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내는 듯 공정한 제도라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사회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 폭력적인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2년가량의 교육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떤 수준에서 탈락하는지, 자신의 상품가치에 따라 가격표가 부착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음에 따라 학교라는 제도가 대다수 사람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기는커녕 고립되게 만듦으로써 공동체를 와해, 즉 현대화된 빈곤을 만들어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정의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배움의 공동체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현대화된 빈곤은 더욱 심해질 게 분명하다.
배움의 공동체
일리치는 학습네트워크라는 연결망을 통해 학교화된 사회를 혁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학교 교육의 대안이 사람을 공부하게 ‘만드는’(일리치는 여기서 ‘만드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람을 인공물 다루듯 조작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설에 공적자원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환경 사이에 새로운 교육적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라 얘기했는데, 이는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향한 발걸음, 즉 참다운 앎과 배움이라 할 수 있겠다. 일리치가 이야기한 학습네트워크는 ‘모든 사람이 배움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또 다른 사람의 배움에 기여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이는 곧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배움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 다시 말해 제도에 포섭되지 않은 자유인이 배움의 공동체를 찾아 정진하는 과정의 일부라 받아들여도 문제없을 듯하다.
그러나 배움이 이처럼 의미 있는 뜻을 담고 있어도 산업화가 일궈낸 지금의 제도는 배우는 자를 본질에서 떼어 놓는다. 제도는 사람이 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일찍이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자동차(산업사회의 부산물)는 사람이 세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제도에 갇혀 사유하지 않고, 제 손으로 무엇 하나 해낼 수 없게 된 인간들은 스스로 인공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학교는 다양한 의미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를 차단해 버린다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인공물, 그리고 기득권만 이해할 수 있는 제도는 사람을 제한함으로써 상상력을 잃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제도에 의해 초연결되었지만, 파편화된 채 스스로 부품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 연결되어야 한다. 배움의 공동체를 찾기 위해 필요한 건 잠시 잊고 있었던 우정과 사랑 같은 원초적 덕성이어야 할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문지방을 넘고, 함께 밥을 먹는, 언뜻 비효율적이라고 불리는 이 행동들이 바로 제도에 저항하는 움직임의 시작이자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는 과정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진정한 배움의 공동체는 그 속의 관계가 자체로 “값을 매길 수 없으며 매우 다른 방식으로 양자 모두에게 혜택을 준”다고 한다. 내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선생님 역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바 있다. 관계 속의 소중함은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관계를 맺어주는 우정과 사랑은 배움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빠져선 안 된다.
일리치는 인간의 이상적 삶의 형태를 ‘공생공락’이라 정리한다. 주변의 벗들과 웃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따뜻한 분위기를 그리는 말이라고 옮긴이가 풀어 이야기해 주는데, 그의 말을 조금 더 빌려 보면 공생공락이란 ‘절제된 즐거움’이라는 뜻과 통한다. 제도에 포획된 인간이 살아가는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와 안락을 벗어나 생기 넘치는 실존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리는 것이 곧 공생공락, 절제된 즐거움인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처럼 쾌락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 고민과 고통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서로의 삶을 묻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상인 것이다.
내가 『학교 없는 사회』를 통해 본 일리치의 사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제도화된 사회에서 길러진 소비주체라는 고약한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고자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을 제도에서 해방시키는 것, 즉 학교 없는 사회가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그의 언어로 보듯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산업문명의 희생양이 된 자연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자급자족의 삶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정리하면 이반 일리치가 구상한 학습네트워크, 즉 배움의 공동체는 공생공락이라는 이상과 통한다. 일리치가 이야기하였듯 “교육이라는 연결망이 사람들 각자에게 기회를 열어주어, 자기 삶의 매 순간을 배움과 나눔의 돌봄의 순간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의 양식이라는 사실이다.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말로 『녹색평론』을 펴내셨다. 희망, 일리치에 따르면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선함을 믿는, 즉 제도에 포섭되지 않은 인간 삶의 근간인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인간의 가치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제도화되고 얼핏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진보’의 정신이 아닌 자신이 출발한 곳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해 고민하는 희망에서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의 선함을 믿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 아직 연결되길 바라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한다. 그 안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만나는 신비롭고도 아취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생산하리라 예측하는 ‘기대’는 이러한 경이로움을 선사할 수 없다. 일리치가 책 말미에서 말하듯 “합리적인 계획, 과학적 정신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생태적 파국과 공동체의 와해이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일리치가 이야기한 ‘희망’을 갖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공생공락이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