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의 연주회를 보러 가는 길에 오랜만에 서울의 골목길을 걸었단다. 대학 오케스트라의 동아리 발표회였고 너는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했는데 내가 앉은자리에서는 네가 보이지 않아 음악을 들으며 네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눈을 감고 상상했단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여름밤 향기를 기억하고 있단다.
나는 네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준 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고 시간이 궁금하지 않아도 자주 그 시계를 바라보고는 한단다. 이제는 내게 가끔 말을 걸기도 하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해주고 웃어 보이기도 하는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삶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단다. 네가 배맛이 나는 탱크보이와 방울토마토를 먹고, 좋아하는 비투비의 콘서트에 가고 여름 저녁의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설 때 나는 네가 거기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 생에 고맙다는 생각을 한단다.
같이 미용실에 가서 너는 염색을 하고 동생은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 미용실 큰 유리창으로 보이던 여름의 하늘과 구름,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 그리고 문제집을 풀고 있던 너를 옆에서 오래 바라보았단다. 그날의 밝고 투명하고 싱그러운 모든 것들을 너에게 주고 싶었단다. 아주 어린 날의 너에게 그랬듯이.
2.
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나는 여전히 모르는데 그건 아마도 너를 나의 언어로 잡아두고 싶지 않아서일 거야. 너는 나의 말보다 세상 누구의 말보다 언제나 크단다. 아가야.
그래도 오늘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쓰고 나면 분명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너의 이야기를 여기에 남겨두려고 한단다. 이렇게라도 시작하고 싶어지는 나의 마음은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를 기억하려는 용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단다.
3.
얼마 전에 너는 시인 최백규의 <열사병>의 한 문장으로 블로그 글을 시작하면서 '해사하다'는 단어의 뜻도 작게 적어두었고 나는 그날 아침에 네 글을 읽었단다. 아가야, 시인의 말처럼 '천사가 말없이 너의 머리맡을 지켜'줄 거고 너는 '높이 깃든 젊음'으로 '언제까지나 바람이 부는 곳을 치어다보게 될' 거란다.
나는 지금 '매일 밤 슬픈 줄도 모르고 흐드러진 눈빛을 따라 걷다가 돌아온' 내 무수한 젊음의 날들을 떠올리고 있단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너는 말이 없었는데, 나는 네가 침묵으로 내 결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단다. 내 결심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그 무게만큼 가볍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나는 생각했단다. 너는 훈계나 평가보다 이해와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4.
이제 이 편지를 마무리 지어야겠는데,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너의 이름은 채원, 아빠가 지어준 이름. 캘 채, 근원 원. 삶의 근원과 본질을 캐내는 사람. 너는 그 이름이 언제나 좋다고 했지만 나는 네가 아픈 것이 내가 지어준 이름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단다. 명랑하고 밝고 가볍고 빛나는 이름을 지어줄걸.
하지만 미안함은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나는 너와 나의 삶이 더 아름다워지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로 했단다. '지금 여기'와 '내일과 다음'을 더 많이 생각하기로 했단다.
사랑하는 아가야. 네가 읽은 시를 비가 그친 후 햇살이 내려앉은 여름 아침에 소리 내어 읽어본다. 네가 겪었던 기쁨과 슬픔, 네가 겪을 아픔과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곁에 있을게. 오랫동안. 곁에 있어줄게."
5.
열사병 - 최백규(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천사는 내 어깨에 선한 얼굴을 묻고 울다가 집을 나섰다 흰 볕 아래 잠들면 잠시나마 천사를 쫓아 멀리 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해에는 옅은 웃음이 어른대는 꿈을 자주 꾸었는데 그곳에서 천사가 말없이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해진 손목의 맥을 헤아리는 손길이 맑아서 가슴께가 아려왔다 산안개에 베인 눈동자 속으로 노을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매일 밤 슬픈 줄도 모르고 흐드러진 눈빛을 따라 걷다가 돌아왔다
높이 깃든 젊음이 해사하여 언제까지나 바람이 부는 곳을 치어다보게 될 여름의 끝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