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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n 30. 2023

"저를 위해 행운을 빌어주세요."

1.

  굵은 빗줄기와 여름 한낮의 햇살을 오가며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작은 응원과 따뜻한 위로의 말과 표정을 건넨다. 중3 아이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선생님, 저 시험 잘 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가장 따뜻하고 강한 눈동자와 마음을 꺼내 보이며 아이에게 말했다. "시험 잘 봐요."

  그리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선생님, 저를 위해 행운을 빌어주세요."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아주 잠깐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말속에 담긴 많은 삶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내민 두 손목을 살짝 잡고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너의 행운을 빌어." 교실 밖으로 나오자 여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복도에 가득했다. 

  그 아이는 오늘 수학 시험이 어땠을까? 점심은 먹었을까? 맛있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아이의 행운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2.

  오랫동안 이곳에 글을 쓰지 못했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오랜 공백이었다. 왜 그랬을까? 시창작 수업의 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했고, 아이들과 나 사이의 아름다움도 있었다.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어떤 언덕 하나를 넘어가고 있다. 그 순간에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너무 많기는 하다. 이 무수한 감정들을 종이 위에 용기 있게 흘려보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지금 어떤 '시간'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고 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시간, 가만히 나와 세상을 응시할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오랫동안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오늘의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간 교정. 여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눈을 감는다. 바람이 내 얼굴과 옷깃을 스치고 저 멀리 사라져 간다. 나에게서 떠난 것들, 나에게서 떠날 것들을 여전히 나는 사랑하고 있다.


3. 

  수요일에는 급식실에서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에게 밥을 퍼 주었다. 내가 지은 밥도 아닌데 내가 키운 쌀도 아닌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아이들 식판에 담아주고는 "안녕", "맛있게 먹어", "더 줄까"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음에 밥처럼 행복이 차오른다. '아이들아, 이렇게 너희들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싶다.'


4. 

  시창작 수업을 듣는 아이가 포스트잇에 짧은 편지를 적어 보내주었고, 나는 다음 주 시창작 수업 종강 때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시집에 편지를 썼다. 어떤 아이에게는 '이제 펜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자'라고 써주었고 어떤 아이에게는 긴 말없이 '우리는 너를 사랑해'라고 적어주었다. 


  아이의 짧은 편지를 오래 읽어보는 여름 오후 4시의 시간이다. '너의 행운을 빌어줄게. 너도 나의 행운을 빌어주렴'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고 있는 일은  쓸모없는 일일 수도 있고,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일일 수도 있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일들을 벌일 용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놓인다고 할까요.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시 창작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듣지 않는 아이들도 선생님과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아이들도 있지만 이 학교에는 희망과 용기와 사랑이 있어요. 존재에게 감사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도 변함없습니다. 

  불가피를 고뇌하며 시 창작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수업 마다요!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공간이 주어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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