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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n 11. 2024

J에게

1.

  작년 9월, 이곳에 왔을 때 이른 아침 교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다가가 살짝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단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는데 아이는 너무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했단다. 그러다 아이가 “근데 이런 이야기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라고 말했단다. 나는 당연히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조금 슬프기도 했단다.

  그 후로 아이는 복도에서 나를 마주치면 피하기도 했고, 아이의 단짝 친구가 내게 "선생님, 00가 선생님 부담스럽대요."라고 말하자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단다. 열어둔 교장실 앞으로 얼굴만 살짝 내밀고는 복도를 도망치듯 달려가기도 했단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우리는 아이가 그린 그림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단다. 가령, 이런 대화들. “네가 그리는 사람과 사물의 표정이나 몸짓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  “그건 아마, 제가 제 감정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일 거예요.”


  지난주에 아이는 내 책상 위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선물처럼 놔두고 종이 위에 이렇게 썼단다.    


여기에 그림 두고 갑니다.

언제나 제 그림 높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00 학생-

 (담주에 그림 얘기해주세용)



2.

  J야,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잘 지내고 있단다. 얼마 전에 Y에게서 문자를 받았단다. 지금이 되어서야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단다. Y는 '너무 사랑하는 존재들을 구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이제야 알아서 죄송해요'라고 썼단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단다. 그때 내가 느낀 많은 감정 가운데 하나인 한계와 절망을 이해해 준 것 같아서.


  하지만, J야, 어쩌면 그 시절, 나는 언제나 내가 가진 최선과 최대의 것을 활용해서 무엇인가에 계속 도전했던 것 같아. 때로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내게는 없는 것까지도. 그래서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나는 내가 느낀 한계에 정직하고 싶었고 그때 그 대책없던 절망에도 솔직하고 싶었단다. 그래야 누군가는 내가 겪은 그 장벽을 훌쩍 넘어갈 수 있으니까.

 

  유월의 초여름, 운동장의 느티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초록의 소리를 내고 있는 지금, 나는 왜인지 네가 내가 멈추어선 곳에서 더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단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드는구나. J야.  


3.

  Y는 문자의 마지막에 '내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이었는지 되새기며 힘을 얻는다'고 쓰고는 너와 내가 자신에게는 '엄청난 희망'이라고도 썼단다. 너와 내가 동시에 적힌 그 문자를 바라보며 우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함께 있는 것에 뭉클했단다.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희망에 다다랐구나. 희망의 무기를 가졌구나.


4.             

  나는 지금 학교에서 그림을 선물로 준 아이에게 편지를 쓰고 있단다. 네가 나에게 감사패를 주던 그날을 떠올리며. 감사패에 너는 이렇게 적어주었단다.


"당신은 매일 풀꽃을 다시 거머쥐는 듯합니다.

시와 햇살만 지니고서 북극을 여행하자고

떨리는 음성으로 사랑을 건네시지요" 



  오늘에서야 나는 이 문장을 너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단다. 시와 햇살만 지니고서 북극을 여행하자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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