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온 남편과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다.
두어 번의 숟가락질로 시장기를 달랬을 즈음 첫째가 말했다. “엄마, 나 금요일에 10시까지 수학학원 가야 돼.” 추석연휴 첫날이었지만 대부분의 학원은 중간고사 준비로 아이들을 불러대느라 분주했다.
‘금요일’, ‘10시’, ‘수학학원’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음절 마디마디 부서지고 엉켜들어 야멸찬 돌멩이가 되었다. 날선 획들이 가시처럼 박힌 돌은 순식간에 식탁 공기를 휘젓더니 거친 잔물결을 새겨놓았다. 슬쩍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중학생인 아이가 학원을 가는 것이 눈치 볼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불안해진 마음은 평범한 일상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명절 전날 시댁에 아침 일찍 못가게 되었다. 그래서 차례음식을 장만하러 큰집에도 못가게 되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추석이나 설 전날이 되면 시어머니 없이 혼자 가서 전을 구웠다. 그렇게 몇 해를 유지해온 질서가 아이의 말로 인해 금이 가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내 의지와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었지만,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늘 나였다.
결혼 후 첫 명절이 되었고, 명절 전날 우리는 시댁에서 잠을 잤다. 남편을 제외한 모든 것이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채 벌서는 아이처럼 보낸 하루가 서러워 눈물이 났다. 남편은 그런 나를 토닥이며 ‘내일 일찍 처가에 가자’고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놓여 잠이 들었다. 명절 당일이 되어 큰집에 다녀오고, 해가 떨어졌을 즈음 시누이네가 왔지만 난 여전히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거실에 누워있는 남편을 대신해 시누이의 남편이 우리의 가방을 차에 실어주었다. ‘일찍 나서자’ 했던 그의 위로는 희미해지더니 그 색을 잃어버렸다. 따뜻했던 말로 충분했던 마음엔 옅은 자국이 남았다. 그날 밤 나는 엄마에게 전화해 못가게 되었다며 석연찮은 변명을 덧붙였다. 괜찮다고 대답한 엄마는 따뜻하게 데워놓았던 저녁상의 닭고기 조림을 차가운 냉장고에 넣어야 했다. 우리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친정에 갈 수 있었다.
“엄마가 김장하러 오래.” 남편이 시어머니의 말을 전해준 것은 11월 보통의 어느 날이었다. 며칠 후 시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무, 배추, 당근 등을 사고, 아무도 없는 시댁 거실에서 빨간 고무 다라이에 수북이 담긴 마늘껍질을 벗겨냈다. 배추를 소금에 절였고, 절인 배추에 양념을 버무려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며칠에 걸친 김장이 끝난 저녁 빈 김치통을 들고 시누이네가 왔다. 시어머니는 꼭꼭 눌러 많이 담아 주라는 당부를 하였다. 시댁 식구들과 저녁을 먹은 후 찬물에 설거지를 했다. 종일 종종 걸음을 치면서도 시댁식구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지만, 가슴 한켠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시댁에 가기로 한 주말, 굵은 빗줄기가 아스팔트를 뚫을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며칠 전 시아버지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였다. 아기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아이에게 감기가 옮을까 걱정이 되었다. 혹여 감기 걸릴까 걱정이 된다는 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 아빠를 무슨 바이러스 취급하냐?, 너 지금 그 핑계로 안 가려고 하는거지?’ 하며 아이를 방패삼아 큰 불효를 저지르는 듯 여기는 남편을 또 마주하게 될까 봐 지레 겁이 났다.
내 편이 아닌 모습을 확인하는 건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오늘 꼭 가야 돼?” 날씨 핑계를 대며 에둘러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조마조마했던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아이를 앉고 차에 올랐다.
결혼한 이후 남편은 내내 효자였다. 무수히 많은 날 동안 한번도 효자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서운하고 야속했다.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랐던 많은 날에 그는 늘 내게 등을 보였다. 나에게만 보이던 등. 두드려도 돌아보지 않고, 돌려세우려 해도 꿈쩍하지 않는 벽과 같은 등은 언제나 모질었다. 견딜 수 없었던 날엔 그에게 닿지 못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얘기를 하다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다가 악을 쓰고, 서러워서 울다 지쳐갔다. 울툴불퉁하고 엇비슷한 우리의 이야기는 그 형태를 바꾸지 않은 채 반복되고 시시해져 가고 있었다.
부부가 되면 내 집이 생기고, 그 집엔 나와 내 편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내 편이라는 데에 조건을 붙인 적이 없었기에 마주하기 힘든 그의 눈빛, 태도, 말투는 여전히 그 자리 그 시간에 반복해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팽팽했던 끈을 느슨히 잡는다. 늘어진 길이만큼 숨이 쉬어지고 비로소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놓지않고 기다리는 동안 늦지 않게 오라고, 눈빛으로, 챙김으로 그에게 말을 건다.
가끔 엉망으로 흐트러지더라도 함께 사는 여기가 우리의 집이니까 그의 속도를 인정하며 그 속도대로 걸어 올 수 있게 가만히 놓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