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쉼

안녕, 나의 제주

by 지개인

삶에는 필연의 회귀본능이 있다. 내 안에 자리한 남편과 아이들의 존재감 때문일까?


어렵지 않게 반복되는 집안 일.

방과 후 아이들과의 어쭙잖은 말씨름.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상.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반복되는 일들은 정해진 간격으로 밀려드는 밀물과 같았다. 순서에 따라 나누고 시간에 맞게 해두어야 잘 닦여진 일상의 하루가 매끈하게 흘러갔다. 매일 버려지는 쓰레기들처럼 마음의 찌꺼기들도 조금씩 버려져야 하는데 그럴만한 시간과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더구나 반복되는 일상을 모른 체할만큼의 깜냥도 없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과 속쓰림은 그대로 한 차례 지나고 나면 그뿐이었다. 과도하고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스트레스라고 말하기엔 민망했다. 하지만 사소하게 지나간 하루는 하나의 옅은 층을 만들었고, 점점 쌓여가는 층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느새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통과한 수많은 시간들은 모두 내 삶이 되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모든 걸 토해내도 끄떡없을 너른 바다가 보고 싶었다.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

해안가 도로를 달리며 보이는 나즈막한 풍경에 문득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운 해변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모래사장을 걸었다.

듬성듬성 숨구멍이 뚫린 검은 돌무더기들과 훤히 그 속을 내보이는 해안가 얕은 바다, 그 곳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아이들, 그 모든 것이 제주였다.

두 눈 가득 들어오는 바다는 수평선에 가서야 끝이 났고, 그 바다에 실려 오는 살가운 바닷바람은 두 발이 제주를 딛고 서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그 전 몇 차례의 제주여행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쉼’을 만끽했다. 가족을 두고 온 여행은 그동안의 간절했던 해방감을 선물해주었다.

바다가 그대로 풍경이 되는 카페에 앉아 쫓기지 않고 커피를 마셨고, 한가로운 햇살아래에서 쉼없이 걸었으며, 바다만큼 푸르렀던 가을 하늘과 그 속의 뽀얀 뭉게구름을 마음껏 올려다보았다.

빼곡히 짜여진 일정을 모두 소화하면서도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나 아닌 사람들의 컨디션이 신경 쓰여 일정을 조정할 필요도, 때에 맞춰 밥을 먹어야할 이유도 없었다.

그 값진 시간들 속 스쳐가는 모든 순간에 오롯한 ‘내’가 있었다. 대명사가 아닌 고유명사가 되어도 괜찮았던 시간들과 그곳에 함께 했던 풍경들이 ‘숨’이었고, ‘쉼’이었다.

고맙다. 제주. 너여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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