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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할배 Mar 12. 2022

변소에서 사단장실로(2)

돌아보면 언제나 부끄럽다 #8-2

눈이 부셨다. 참모장실 선임하사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햇빛이 하얗게 눈을 찔렀다. 창문을 통해 비친 햇살이 모자와 어깨의 은빛 계급장에 부서졌고, 숱이 없는 참모장 대머리에 반사되었다. 그의 계급의 높이는 거의 이성계급이었다.    

참모장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자네가 변 이병 인가? 군대 생활 힘들지 않은가?”

"힘들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때는 정말 힘든 시기였다.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는데 사단장님이 찾으시네. 바로 가 보도록."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큰형님 동기가 아무리 특진을 한다 해도, 별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었다. 어명에 가까운 명령이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사단장이 도대체 뭐 때문에 본부대에서 제일 쫄띠기 이병을 찾는다는 것인가. 짧은 시간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짚이는 것이 없다.    

사단장실 문을 열었다.


"화랑, 이병..."


나의 큰 목소리에 앉아 있던 중위 한 사람이 급히 자신의 검지를 입에 대어 '쉿'하며 나의 말을 막았다.


"뭐냐?"

"이병 변○○..."

"조용히 하래두!"    


그 중위는 부관이었다. 거기는 전속부관실이었다. 명찰을 보던 그가 "니가 변○○이구나.' 하였다. 내 이름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자신의 책상으로 데려가 악보를 하나 펼쳤다.


"너, 이거 설명할 수 있어?"

"저는 악보 볼 줄 모릅니다."

"아, 악보가 아니야. 사단가 가사 후렴구를 봐."    


11사단의 별칭은 화랑사단이었다. 그가 보여 주는 사단가 후렴구는 다음과 같았다.     


[화랑의 가는 길에 승리가 있고

화랑의 오는 길에 영광이 있다.]    


하기식 때 사단장님께서 장병들이 부르는 사단가를 유심히 들었단다. 사단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식이 끝나고 부관에게 '사단가'를 가져오라고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부관에게 말했다.


"가고 오는 것은 화랑이다. 그러면 '화랑이' 가야지 어떻게 '화랑의' 갈 수 있나? '화랑이' 오는 것이 맞지 '화랑의' 올 수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 부관?"

"넷,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단가를 고쳐야겠구만."    


하지만 지금까지 불려온 사단가를 함부로 고치는 것은 사단장으로서도 꺼림칙했던 거 같다. 그래서 유권 해석이 필요했었고, 서울대 국어과나 국문과 출신을 찾았다는 것이다. 부관부에서 조사를 하였고 두 명이 있었는데 본부대에 속한 덕분에 내가 불려갔던 것이다.    


"설명 드릴 수 있겠어?"    


부관이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설명 가능 여부를 물었다.      


" 넷, 해 보겠습니다."    


속으로는 떨렸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 때 다루었던 것이다. 부관이 사단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왜 경례 구호가 클수록 더 많은 존경이 담긴다고 생각했을까? 태어나서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른 적이 없었다.    


큰 책상에 앉아 있던 사단장이 일어섰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인간이 달고 있는 별은 처음 봤다. 뒷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아래 태극기 사단기를 비롯해 여러 깃발이 꽂혀 있고 오른편에는 회의용 테이블이 있었다. 크기가 교실 하나만한 넓이나 되었을까?    


"이리 오라우."


사단장은 함경도 출신인 거 같았다.


"자네가 변군인가? 군대생활 힘들지 않은가?"

"힘들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의례적인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 사단장은 회의용 테이블에서 나를 자신의 옆 자리에 앉게 했다. 거기엔 연대장인지 대령 셋이 있다가 자리를 양보했다. 단군급의 별 두 개를 보고 나니 무궁화 셋이 아까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사단장은 부관이 얘기했던 사단가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다시 얘기했고 나는 사단장의 의심이 타당할 수 있다고 일단 긍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 관형격 조사 '-의'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기미독립선언서' 첫머리나 동요 '고향의 봄' 등을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 관형격조사가 주격을 대신하여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고 사단장도 수긍하는 듯했다. 다 듣고 난 후에 사단장은    


"그래서, 사단가는 고쳐? 말어?"    


굉장히 난감했다. 자칫 잘못 얘기했다가는 죽는 거 아닌가 싶었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사단가를 지은 사람이 서정주이기에 '시적 허용'으로 자리를 모면해야만 했다.    


"제 생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지은이가 서정주인데 그는 내로라하는 시인입니다. 시인들은 의미의 효과적인 전달이나 시의 가락을 고려해 문법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 의견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모교 교수님께 편지를 드려 해석을 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한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상당히 헤맸던 것 같다.


"그렇게 하라우."   


겨우 사단장실을 벗어났다. 정보처 사무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소속 쫄띠기가 사단장에게 불려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슨 일인지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물어 보던 쇠다마 과장님이 빨리 편지 쓰라고 채근했다. 그날 오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지 한 통만 썼다.        



ㅁ후기

대략 2주일 정도 그야말로 창자가 타는 심정이었다. 교수에게 사정이 급하다는 말을 했는데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 사단장과 두 번 조우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 자리가 휑한 느낌을 받았다. 사단장이 참모들을 거느리고 사병식당 순시를 하는 중이었다. 높은 사람은 피하는 것이 상책인데,     


"밥 먹을 만해? "   


전에 들어봤던 사단장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섰다.     


"답장 왔어?"

"아직 안 왔습니다."

"교수가 성의가 없구만."    


또 한 번은 점심 먹고 급하게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장교 식당 앞에서 손짓을 하였고 또 같은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낌새를 채고 잘도 피하는데 나는 왜 자꾸 걸리는지 확실히 눈치가 모자랐다.    


2주 정도 지난 뒤에야 답장이 왔고, 다행스럽게도 내용은 내 설명 그대로였다. 교수는 끝 부분에 "고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는 의견을 달아 주었다. 사단장이 읽은 후에 말했다.    


"교수가 뭐 이래, 티미하구만. 고쳐야 하면 고쳐라, 고치지 말아야하면 고치지 말라지 '고치지 않는 것이 좋겠네.'는 뭐야."    


이렇게 사단가 문제는 고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 무렵에 다시 사단장실에 불려갔다.     


"이거 초등학생이 나한테 보낸 위문편지야.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인물이 되라는 요지로 답장 좀 써 오라우."    


그날도 오후에 딴 일 아무것도 않고 편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약 7개월 뒤 사단장실 당번병이 제대하면서 그 후임으로 팔자에도 없는 당번병이 되고 말았다.



        


내 얼굴 내 눈치로 당번병을 한다는 것은 서천 소가 웃을 일입니다. 관형격에 대한 문법적 설명이야 전공과 관련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무반장의 연애편지 대필이나 사단장 위문편지 답장은 오해가 불러온 행운이었습니다. 그들은 국어과 출신은 글을 잘 쓴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에 걸친 선입견의 결과는 나를 좀 살 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신병중대로 가는 것을 정보처로, 힘들었던 정보처에서 사단장실로 구제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대학 학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국어과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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