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땅, 남해 다랭이마을에서

by sally

나의 어머니는 투병생활을 꽤나 오래 하셨다. 엄마의 병명은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했고 순간순간이 위중했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넉넉한 그리운 것들이 내 심장에 내려앉았다. 그때 당시 어렵고 힘든 것들을 다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과 함께 어머니가 내게 주셨던 사랑,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나는 꽃이 필 때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아파트 화단과 집 앞 교회 마당,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길을 산책시켜 드렸다. 산책이라곤 30분 남짓이었지만 병환으로 늘어져 육중한 어머니의 몸을 산책시켜 드리기는 등에 땀을 많이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산책시켜 드리는 게 하루의 책임같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딸이 힘들어하는 걸 아시고 절대 나가시려 하지 않으셨다. 모녀의 풀잎 같은 언쟁은 봄이 오면 그렇게 벌어졌다. 나의 어머니는 하루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래서 난 어머니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마지막으로 남겨드리고 싶은 이유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산책시켜야만 했다.



그 해 4월, 봄빛이 지상을 향해 생명들에게 쏟아져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내방송이 거실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흔한 안내방송이었는데 나는 순간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엄마, 관리사무소에서 8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한테 쌀을 나누어 준대요."

"진짜가? 그럼 가야재."


귀도 거의 안 들리시고 혼자 아무것도 못하시는 어머니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신다.

어머니는 "쌀"이라는 말에 번쩍, 하고 들으신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설득시켜서 산책을 나간다. 아파트 화단과 관리사무실 근처를 몇 번 배회하다가 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오늘도 우리가 늦게 나와서 쌀이 없나 봐요. 다음에 또 안내방송 나오면 그때 나와요."


나의 어머니는 다음엔 꼭 쌀을 얻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어머니는 쪽빛바다를 품은 남해가 고향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렸을 때도 평탄하지 않았고,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지다. 십 년 넘게 아버지 간병을 하시면서도 지칠 만도 하셨던 어머니는 결코 그 아버지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적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발목까지 오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시고 연신내 마당에 서성이며 작은 담장 너머,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리운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셨다.


"남해 연죽골에 묻어줘야 한다."

"엄마, 거긴 너무 멀어서 자식들이 가기가 힘들어요."


나는 가끔 어머니의 애절한 표정을 바라보면서도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 애틋하고 애절한 사랑을 따라 아버지 옆에 묻히셨다.


3년 전, 그해 4월 어머니는 벚꽃 흩날릴 때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곳으로 가셨다.

이제 볼 수도 없는 나의 어머니. 지나간 일들에 못 다 해 드렸던 효에 나는 여전히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오랜 시간 견뎌내셨던 어머니 고통에 마지막까지 임종을 집에서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내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회한적 상실이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병중 보았던 어머니가 견뎠던 고통의 시간들. 눈을 감고 그 순간들을 생각할 때면 나는 가끔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앞에 실신한다. 그것은 나의 형제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내가 앞으로 그 고통을 순간순간 기억하며 견뎌내야 할 시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힘겹다. 언제까지 그 시간이 내게 오리라곤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해서라도 어머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