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투병생활을 꽤나 오래 하셨다. 내가 어머니를 오빠네 집에서 모시고 왔을 땐 이미 병색이 짙으셨다. 엄마의 병명은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했고 순간순간이 위중했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넉넉한 그리운 것들이 내 심장에 내려앉았다. 그때 당시 어렵고 힘든 것들을 다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과 함께 어머니가 내게 주셨던 사랑,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어머니는 수시로 대학병원 입퇴원을 반복하셨고, 병원에서도 워낙 유명한 환자가 되었다. 아무도 나의 어머니를 간병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한들 그랬었다. 나 또한 까칠하고 깔끔한 성격인 탓에 맘에 들지 않은 것도 한몫 거들긴 했다. 결국 나는 과도한 간병으로 허리를 다치기도 했었고, 한쪽 어깨를 수술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어머니는 나의 집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고, 결국 지병보다는 코로나로 인해 머나먼 천상으로 애틋한 미소만을 내게 남기시고 홀연히 가버리셨다.
어머니는 나의 집에서 3년 넘게 와상환자로 침대에만 누워계셨다.
봄이 와서 꽃이 필 때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아파트 화단과 집 앞 교회 마당,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길을 산책시켜 드렸다. 산책이라곤 30분 남짓이었지만 병환으로 늘어져 육중한 어머니의 몸을 산책시켜 드리기는 등에 땀을 많이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산책시켜 드리는 게 하루의 책임같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딸이 힘들어하는 걸 아시고 절대 나가시려 하지 않으셨다. 모녀의 풀잎 같은 언쟁은 봄이 오면 그렇게 벌어졌다. 나의 어머니는 하루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래서 난 어머니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마지막으로 남겨드리고 싶은 이유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산책시켜야만 했다.
그 해 4월, 봄빛이 지상을 향해 생명들에게 쏟아져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내방송이 거실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흔한 안내방송이었는데 나는 순간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엄마, 관리사무소에서 8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한테 쌀을 나누어 준대요."
"진짜가? 그럼 가야재."
귀도 거의 안 들리시고 혼자 아무것도 못하시는 어머니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신다.
어머니는 어려서 넉넉하게 자라지 못한 탓에 "쌀"이라는 말에 번쩍, 하고 들으신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설득시켜서 산책을 나간다. 아파트 화단과 관리사무실 근처를 몇 번 배회하다가 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오늘도 우리가 늦게 나와서 쌀이 없나 봐요. 다음에 또 안내방송 나오면 그때 나와요."
나의 어머니는 다음엔 꼭 쌀을 얻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어머니는 쪽빛바다를 품은 남해가 고향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렸을 때도 평탄하지 않았고,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십 년 넘게 지극정성으로 아버지 간병을 하셨다. 십 년 넘게 누워계셨던 아버지, 지칠 만도 하셨던 어머니는 결코 그 아버지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적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발목까지 오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시고 연신내 마당에 서성이며 작은 담장 너머,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리운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셨다.
"나를 꼭, 아버지 옆 남해 연죽골에 묻어줘야 한다."
"엄마, 거긴 너무 멀어서 자식들이 가기가 힘들어요."
나는 가끔 어머니의 애절한 표정을 바라보면서도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 애틋하고 애절한 사랑을 따라 아버지 옆에 묻히셨다.
3년 전, 그해 4월 어머니는 벚꽃 흩날릴 때 천상으로 가셨다.
나는 그때쯤이면 어머니가 투병 중에 계셨던 거실, 12층 베란다 앞에서 유일하게 세상밖을 내려다보셨던 어머니, 그 기억에 다하지 못한 효와 그리움에 아직도 애절한 통곡의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의 땅 남해, 다랭이마을에서. 2025. 4월 유채꽃과 벚꽃이 활짝 피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