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소설 분야에 응모한 적이 있었다.
시작은 그랬다. 친구한테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시간이 없다고 하자, 친구가 "시작이 반"이라고 하며 응원했다. 친구 말 때문에 시작을 한 건 아니지만, 결국 나는 a4 100장 분량의 장편소설을 4개월 만에 빠른 속도로 완주했다. 아마도 언젠가부터 내 안에 소설을 쓰고 싶었던 열망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일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부터 켜고 새벽 2시까지 퇴고과정을 포함해 4개월가량을 그렇게 보냈다. 소설의 구성부터 초안 잡기까지 일도 산만해졌고, 피곤은 겹겹이 쌓였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소설의 인물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울고 웃는 나 혼자만의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소설을 쓰고 나서 등장인물로부터 두 달 정도 헤어 나오기 힘든 시간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일도 미루고 강릉행 기차를 무작정 탔다. 1박 2일 동안 강릉 바닷가에 앉아 인물들을 내게로부터 떠나보내기도 했다. 아직도 인물들은 내 기억에 실제 인물처럼 살아있을 때가 종종 있다. 인물들의 삶 속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간상 무리수를 둔 장편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연히 글은 장편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단편으로 글을 쓰기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창작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새벽 시간도 있었고, 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응모하기도 했다. 물론 좋은 소식은 기대하지 못했다. 이번 응모는 너무 빨리 완주했고, 시간에 쫓긴 것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소설을 처음 쓰면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과정,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나 내면의 모습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4개월의 창작과정은 힘겨웠지만 등장인물들과 함께 또 다른 나를 찾아보고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내가 애써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그랬다.
나는 시대를 노래하고 싶었고, 삶을 노래하고 싶었다. 나는 바벨탑을 쌓으려 내 욕망을 그곳에 벽돌 하나 얹으려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의 애절한 것들이 순간순간 녹아나는 그리운 감정들을 쏟아붓기를 원했다.
사람은 곧 자연이다. 사람은 독자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 역시 자연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생성, 소멸하는 과정의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도 우주의 점 하나 같을 작은 존재로, 소소한 일상의 시간과 그리움으로 생성, 소멸하면서 살고픈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할 순 없다. 삶 속에 죽음도 함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곧, 자연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을 원칙으로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을 이루며 살아간다.
(2025. 봄빛이 찬란했던 5월 강릉)
한때 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관이 팽배해 있었다. 글은 비생산적이라 생각했다. 모든 사물을 생산력과 연결시켰다. 글을 썼던 시간이 가장 행복함에도, 나는 애써 그것을 피해 갔다. 여전히 내 글에는 아직도 그때의 이데올로기적 흔적과 때론 그 염원이 담겨있다. 그것은 내가 암울한 시대의 역사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의 저장고는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다.
우린, 사람으로 와서 암울한 시대를 노래한 것뿐이었다.
우린, 사람으로 와서 희망 가득한 시대를 노래한 것뿐이었다.
그 이상의 글을 기록하는 것은 그 또한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생명. 죽음. 기쁨. 슬픔. 고통. 아픔. 희망. 절망.
자연의 이치처럼 우리의 삶도 모두 순리처럼 굴곡을 이루며 생성, 소멸하면서 살아간다. 대단한 것도 없을 것이고 잘난 것도 없을 우리네 삶이다. 그저 사계절을 지내면서 그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기록할 뿐이다.
내가 다른 시대를 넘어 어찌 글을 쓸 수 있을까.
다만 나는 지금 이 시대의 그리운 것들을 기록할 뿐이다.
무엇이 우릴 그토록 기쁘게 했고,
무엇이 우릴 그토록 가슴 아프게 했고,
무엇이 우릴 희망과 절망으로 인도했는가를.
(2025. 5월 소설을 마치고 강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