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관하여
유월의 눈부신 햇살이 연신내 집 거실 안으로 길게 들어왔을 때, 열일곱 살 그녀는 친구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음대지망생이었던 친구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선반 위를 빠르게 오가며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음률을 듣고 있던 그녀의 심장은 미세한 떨림과 동시에 아련한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온통 미세혈관까지 흘러 들어갔다. 사람의 손가락으로 건반을 건드릴 때마다 들려왔던 소리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소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연주가 끝난 후에 그들은 한동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리, 뒷동산으로 산책을 갈까. 그녀가 말했다. 주근깨가 여름빛에 도드라져 보이는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태양빛이 뜨거운 낮은 언덕 풀밭에 앉았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짧은 나뭇가지를 쥐고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 알 수 없는 생각들의 사색적인 단어들을 끄적거렸다.
나는 풀잎으로 태어나고 싶어,
구름 사이로 빛이 드러나면서 풀잎 위로 빛줄기가 쏟아질 때,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풀잎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낫지.
친구가 말했다.
나는 자라면서 유쾌하고 활달한 형제들과 달리 철학적인 사색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
열일곱 살 때, 처음 접한 염세적인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했다. 그때 당시 나와 같은 고민에 빠졌던, 세검정에 살았던 친구와 밤새도록 새벽하늘 별빛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죽을 때도 같이 죽자 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이과로 전환했고, 그녀는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나이에 자신이 일했던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리곤 그녀는 나와 못다 한 숙제를 남긴 채 시린 하늘로 먼저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 땅에 낙원을 꿈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세계관이 있는 장소를 찾았다. 형이상학적인 종교를 떠나서, 난 손에 잡힐 실제적으로 인간을 낙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이념, 거기에 한동안 격렬하게 사로잡혔다. 사상가들이 시대적 아픔을 행복론으로 귀결시키려 했던 이념들은, 스무 살이었던 그때, 고통스러운 인간의 삶을 이 땅에 유일하게 낙원이라는 공간으로 인도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나의 스무 살은 시대적 격동기에 있었다. 그때 당시 캠퍼스는 최루탄 파편들과 돌멩이들이 땅바닥에 뒹굴었고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햇살 대신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되어 주저 앉았다. 그때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밤을 새워가며 정의를 고민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삶과 죽음의 교차된 생각으로 사로잡혔다. 꿈 많은 스무 살 소녀의 손은 봉숭아 꽃잎을 물들이며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에 최루탄 파편으로, '그날'은 손등에 상흔이 되어 남았다.
무릎과 손에 깊게 파인 그 상흔은 일상에서 무엇을 하든 내 육체에서 그날의 기억을 늘 떠올릴 수 있는, 과거를 끌어당긴 현재의 고통과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누군들 삶에서 최종적으로 평안하게 자유를 맘껏 과거에서조차 끌어당기며 살아가길, 사람들은 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난 그런 시대가 반복적으로 되풀이될 때마다 가시 같은 고통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회한적 현재의 삶을 살아갈 순 없었다.
고통, 상처, 염원은 모두 과거를 스치듯 지금 여기까지 왔다.
살아간다는 것, 이 땅에 온 우리는 견디며 생명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자연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거센 비바람이 불고 폭우가 내리고 폭설이 내려도 자연은 꿋꿋이 이겨내는 것과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사람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삶과 죽음을 수평선 상에 놓고 바라본다.
내 책상 서랍을 열면 10센티 자가 있다. 숫자 1은 삶의 시작이라면 10은 그다음이 없는 마지막 숫자다. 자를 다시 연결해서 만든다는 것은 매끈하지도 않을뿐더러 불안정하며 결국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이란 것, 삶의 끝에는 죽음이란 것에 가 닿을 때 그제서 노곤하게 무거운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마감한다.
죽음은 하나의 자 위에, 삶의 끝에 놓여있다.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삶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개념도 삶을 개별적으로 이질적으로 분리시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삶과 죽음은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 이질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어떠한 일로 죽음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조차 우린 삶의 끝 10센티 자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사람이 죽음 없이 어찌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한다.
이 땅에서 누가 영원히 삶을 누릴 것인가. 인간은 그대로 유한하고 제한된 시공간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제한되었기에 사람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유한하기에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아련한 것들의 기억의 재생이 아닐까 한다. 완전했고 영원하다면, 우리의 존재는 아름다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시공간에서 안간힘을 쓰며 견디려 애썼던 시간들이 지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노곤한 육체를 모두 내려놓고 안식에 머무른다. 난 지금 죽음에 대한 예찬론을 거론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삶의 끝에 주홍빛 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과도 같은 자연을 말함이다.
우리는 곧 자연이라 했다. 낙엽이 수분을 다 날리고 마지막 땅에 떨어질 때 이것이 자연이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는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그와 같은 이치다. 봄꽃이 피고 꽃잎이 하나둘 메말라 떨어질 때 그 꽃은 제 아름다움을 다하고 여름의 자리를 내어주며 사라지는 것이다.
연약하고 유한한 사람이 암울한 우주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함께 웃고 울고 사랑하면서 지낸 그 세월들을 생각하면 너무 아름다운 순간들이라 생각한다.
아침해가 뜨고 있을 때 수평선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이 있다. 바다가 삶이라면, 하늘은 죽음이라 말하고 싶다. 삶과 죽음이 수평선상에서 조화를 이루며 아침해가 떠오를 때 은빛물결로 눈부시다 말한다. 바다가 있었기에 하늘이 아름다웠고 하늘이 있었기에 바다가 아름다웠을, 아침해에 윤슬이 반짝이는 그 수평선에 우리가 서 있음일 것이다.
유한했기에 아름다웠고, 연약했기에 찬란한 인생이라 말한다.
인생은 삶과 죽음을 이끌고 가는 짐수레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초원길의 꽃마차다. 나는 가끔 기차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의 낯선 움직임일지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삶 속에 그들의 연약한 것들이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것들이 영원하다면 이것은 신의 낙원일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불완전한 존재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기초적인 삶의 고통과 억압에서 자유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모든 인생의 구속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한 초원의 꽃피는 지평선을 걷고 있다. 지평선 끝에는 비록 사람이 생각지 못할 것들이 무언가 있다 한들, 우리의 삶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만날 것들에 대한 소망만으로 가슴 벅차다 할 것이다.
'열일곱 살, 어린 난 풀잎으로 살고 싶었다.'
여전히 그 생각은 어른이 한 참 된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