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날들에 서서

시드니 센테니얼파크에서,

by sally

봄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토요일, 정오를 지난 나른한 시간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뒤늦은 나이에 숙제를 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창 너머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봄을 알리는 전령사 자카란다꽃이 활짝 피어 보라색 분칠한 얼굴을 화사하게 내밀고 있다.



책상 위 작은 꽃화분에 빛줄기들이 쏟아져 내리고, 컴퓨터 화면의 커서는 깜빡거리며 다음 문장을 요구했다. 최초의 아담은 도대체 몇 살일까? 시선을 다시 자카란다꽃에 두었지만 기억의 질문은 창세 전에 선 것처럼 아득하고 공허했다. 순간, 여리고 감미로운 사람의 목소리가 봄빛을 뚫고 들려왔다.


- 콩수나 나가자,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우주 모퉁이 어딘가에 서 있던 난, 빛의 속도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현실 세계인, 지구 남반구 시드니로 급속히 내려왔다. 사람의 목소리는 배드민턴 단짝 친구 곰둘이다. 방안에 가득한 햇살을 뒤로하고 마지못해 까칠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나갔다.

(콩순과 곰둘은 나와 그녀의 별명. 나는 단백질을 콩류에서 주로 섭취하다 보니 그랬고 곰둘은 곰인형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다.)


- 나 과제가 좀 남아서 오늘은 못...


티브를 틀어놓은 채 소파에 곰인형을 껴안고 있는 곰둘의 우울한 눈빛과 마주쳤을 때, 순간 말을 바꾸었다.


- 어디 가고 싶은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식탁에 기대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아담한 체구에 얼굴이 동그란 곰둘은 대답 없이 베란다 창밖을 바라만 본다. 그녀의 시선은 빛을 머금은 자카란다꽃에 있었으나 그조차 무심한 듯 상념에 잠겨보였다. 침묵이 흐르고 티브에 봄꽃 소식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빠른 말만 거실을 가득 채운다.


그녀의 성격상 깊은 상념은 어울리지 않는다. 곰둘은 단순 엉뚱, 발랄한 성격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삭히는 편이다. 곰둘이 저럴 땐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다. 그렇다고 호주에서 배드민턴 단짝의 상념을 외면할 순 없으니까 오늘은 곰둘에게 내 시간을 양보하기로 했다.


- 농원에 꽃구경 갈까?

- 거긴 네가 좋아하잖아.


여전히 퉁명스럽다. 맞다. 꽃농원과 곰둘은 거리가 멀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농원에 곰둘이 순순히 끌려가는 것은, 그곳에 파스타 맛집과 아늑한 정원에서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이유 때문이다. 곰둘에겐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꽃은 기계적인 것이나 조립하는 물건들이다.(그녀의 직업은 IT)


- 무슨 일 있는 거야?


내 질문에 대답 대신 곰둘은 슬픈 눈망울로 티브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러고 나서는,


- 가자, 센테니얼 파크에,

- 거기 가서 뭐 하게?

- 자전거 타려고,


툭툭거리는 그녀의 말투가 뭔가 일이 있나 싶어서 곰둘이 하자는 대로 일단 따라가기로 했다.

오늘도 곰둘이 운전대를 잡았다. 난 옆좌석에 앉아 봄빛에 반짝이는 가로수 나뭇잎들을 보며 한국의 4월을 생각했다. 늘 같은 거리를 가도 이방인의 삶은 낯설고 고독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이 항상 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고 곰둘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빰이 이방인의 삶처럼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였다.


그런 사이에 차는 시티에 있는 센테니얼 파크에 벌써 도착했다. 파란 봄하늘 밑에 너른 연둣빛 잔디밭이 봄빛을 받아 눈부셨다. 센테니얼 파크는 시드니 시티에 위치해 있는 굉장히 넓은 공원이다. 그 안에 커다란 호수(연못일 거다)가 있고 말이 다니는 전용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있다. 호수가 있고 넓은 잔디가 있고 커다란 고목나무들이 호숫가를 끼고 펼쳐져 있는데 전체를 보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남은 사진이 없다)


발 빠르게 자전거 대여점으로 향하는 곰둘을 따라 쫓아가면서 봄날에 서서 그리운 시간들의 감정들을 하나둘씩 가슴 안에 저장해 놓는다.(햇빛에 반짝이는 잔디밭이나 호숫가 의자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자전거는 2인용이지만 크기는 마차처럼 꽤나 크고 작은 자동차 같기도 하다.(기억에 4인승까지 있었던 것 같다)


- 너 또 페달 안 밟을 거지? 맨날 나만 힘들게 밟게 하고, (잘 먹는 곰둘은 힘이 많다)

- 알았어, 열심히 밟을게.(먹는 게 부실한 난 힘이 없다)


언제나 곰둘은 힘 있게 페달을 잘 밟았고 나는 설렁설렁 밟다가 곰둘에게 혼나면 또 밟는 척 하다가 만다. 자전거 타기가 끝날 때쯤이면 항상 곰둘은 땀을 흘렸고 힘들어했다. (거의 곰둘이 페달을 밟았다)

공원이 워낙 넓다 보니 한 바퀴만 돌아도 꽤 걸렸다. 우린 두어 바퀴쯤 돌고 나서, 호수 쪽으로 연둣빛 나뭇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고목나무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며 아련한 봄날 속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한낮의 윤슬은 아름답게 반짝였고 우린 각기 다른 생각에 젖어 있다가 아랫입술이 도톰한 곰둘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나 짝사랑하는 사람 있어.


곰둘의 저돌적인 언어의 표현이다. 난 깜놀했지만 곰둘의 감정을 존중하며 주의 깊게 귀를 세웠다.


- 뭐라구? 짝사랑? 언제부터?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곰둘에게 짝사랑에 대한 돌출된 감정 표현은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마음이 꽤나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 6개월 됐지.

- 누군데?

- 회사 같은 팀 동료,

- 아, 저번에 집까지 픽업해 준 그 호주 남자?

- 응...(들릴듯 말 듯)

- 너네 팀 여섯 명밖에 안된다고 그랬잖아. 그 남자가 눈치채고도 남았을 텐데. 고백이라도 하지 그랬어.

- 고백...못했어. 근데 그 사람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며칠 전 우리 팀에 알려왔어.

- 뭐...? (급실망, 놀란 표정과 말투로)

- 그동안 쫌 힘들었어.

- 짝사랑... 그거 슬픈 건데...

- 그냥...그랬어. 이제 다 지나갔는데 뭐.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근데 같은 팀인데 불편하지 않겠어?

- 그동안 문제가 좀 생겨서 팀이 다시 구성됐어. 그 사람은 멜버른으로 가게 됐으니까 만날 일은 없겠지.

(난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부터 돌리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울 것만 같았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우린 호수를 바라보면서 풍경화에 잠시 동화되었으나 생에 대한 헛헛함이 자연을 향한 시선과 사람에 대한 감정이 서로 대조를 이루었다. 어느 날부턴가 곰둘이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 있었던 이유가 그랬던 것이다. 우린 한참 서로 말이 없이 잔잔한 은빛 물결이 흐르는 호수 저편의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곰둘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일어선다.


- 자전거나 타자, 신나게.


곰둘의 평소 발랄한, 감미롭고 여린 그녀의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흰 면티에 파란 줄무늬 셔츠를 걸친 그녀가 터덜터덜 저만치 세워둔 자전거를 향해 걸었지만 곰둘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과 약간의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우리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햇살이 가득 비쳐 빰이 투명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 그럼 우리 신나게 한 번 또 돌고 올까?


짝사랑으로 상심이 큰 곰둘을 위로한답시고 그동안 꾀를 부리며 밟지 않았던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고, 곰둘도 그녀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자전거 페달에 온 힘을 다해 넘치도록 그 절망의 에너지를 부으며 밟기 시작했다.


- 달려, 달려,


곰둘의 짧고, 굵고, 신나는 목소리가 드넓은 센테니얼 파크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한편 그녀의 여린 목소리는 짝사랑에 대한 절망과 함께 애절한 슬픔 또한 곁들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과 더불어 자전거는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붙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속이 붙으면서 페달에 발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자동으로 빠르게 돌아가자 순간, 우린 당황했다. 급제동을 할 여유도 없이 마차 같은 커다란 자전거는 갑자기 무기처럼 느껴졌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작은 봄바람에 세차게 휘날렸다.


속도에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고, 우린 긴장한 상태로 서로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런 사이 자전거는 전용도로를 벗어나 풀밭이 무성한 작은 둔덕으로 향했고 잠시 뒤 자전거는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도 자전거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이후 난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 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이 보이고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였다. 시선을 돌려보니 자전거 뒤편에서 곰둘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우린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제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 후 갑자기 크게 소리를 내어 우린 한참을, 그렇게 웃고 또 웃었다.(다치지 않은 탓인지 창피함도 느꼈지만) 그 웃음은 곰둘에 대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그녀의 상념을 훌훌 털고 일어서려는 통쾌한 것이었다.


그날 곰둘의 짝사랑은 자전거 탄 넘어진 풍경이라는, 엉뚱 발랄함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짝사랑 해프닝은 벽에 걸린 곰둘의 추억사진으로, 현재의 살아갈 그리움으로 내 가슴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방인의 낯설고 여린 삶이 묻어있었던 우리들의 산책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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