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by sally

바람이 분다.

바람 사이로 빗줄기가 가늘게 휘날린다.

이미 어둑해진 도시의 거리 속 퇴근길, 문득 엄마 품에서 나와 세상에 첫 발을 디딘 아기처럼 바깥바람이 차다고 느낀다. 얇게 걸친 카디건 사이를 비집고 찬기운이 파고들면 나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를 모른다. 세포 하나하나가 움츠려 들기 시작하고 눈망울은 생의 미련을 떨어내지 못한 채 그리움을 불러내 촉촉해진다. 계절의 감각도 모른 채 바깥 날씨가 피부에 와닿을 때에야 비로소 계절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항상 바쁜 일 끝엔 허무함이 계절 속에서 나를 곧잘 잃어버리곤 한다. 최근에 일에 떠밀려 나의 존재는 소멸된 듯이 살았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몸살이 나듯 아팠다. 소멸의 존재로 향할, 내 현재의 삶이 가련한 것일까.

생의 슬픔이 문득 밀려온 저녁 무렵이다. 존재와 생의 슬픔조차 모두 소멸의 과정일 뿐이런가.

불현듯 열 아홉살, 염세적인 철학관에 보조가방 하나 달랑 메고 광야를 헤매듯 다녔을 때도 존재의 소멸보다는 생에 대한 의미를 찾았다. 오히려 때늦은 나이에 가을바람이 나를 소멸의 길로 안내한 것에 대한 예찬을 할 노릇인가. 계절에 대한 예의와 줏대가 없다.




바람이 제법 불어온다.

빗줄기도 바람 따라 흐느껴 우는 듯 출렁인다.

밤빛이 진하게 비바람 속에 스며든다. 허무에 걸린 붉은 잎들이 비바람에 떨어져 거리를 뒹굴다 어느새 겨울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붉은 잎 이전에 연둣빛 새순은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을 테지. 어둠에 묻혀 쓸쓸한 나뭇가지에 걸린 몇 개의 붉은 잎들을 가만 쳐다보고 있노라니, 이름 모를 나무 우듬지에 앉은 새처럼 비를 맞으며 고독한 절망을 품고 있다.



소멸.

사라져 흔적조차 없다.

육중한 무게를 딛고 엉겅퀴를 헤치고 척박한 땅에서 얼마큼의 소산물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내 영혼의 값은 경매시장에서도 제 값을 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점점 소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멸은 바람보다도 못할 한 줌의 재가 되어 그 바람 사이사이로 흩날려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 재는 그때서야 어느 허공에 맴돌며 낱알갱이 먼지가 되어 자유롭겠지.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을 완전한 자유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할 소멸은, 무게값조차 나가지 않을 먼지, 곧 그 하나의 가벼운 자유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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