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것들의 삭제 - 이데올로기
소슬한 가을바람이 지면으로 낮게 내려와 불어오면 여린 풀잎들은 몸을 바르르 떨며 리듬을 타듯 일정하게 흔들거린다. 그 모습을 저만치서 보니 초록빛을 머금은 호수에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완연해 보였던 가을빛도 제 모습을 감춘 지 꽤 된 것처럼 대지는 아직도 촉촉하게 눈물을 머금은 듯하다. 고개를 들어 걷힐 것 같지 않은 비구름을 바라보았다. 순간, 묵직한 것이 내 가슴 한가운데 뭉쳐 응어리가 되어 막힌 듯하다.
일상의 평온한 것들의 자유,
그것은 표면적으로 에덴동산의 자유처럼 고요했지만 내면적으로 응어리진 것은 가끔 내 속에서 회오리바람 같은 소동을 일으킨다. 그럴 때마다 난 암울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숨죽이며 마론인형이 되어 버린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기억했지만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야만 했었고, 잊어야 살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지나도록 내 가슴에 파묻혀 난 그 앞에서 숨소리도 낼 수 없었고, 울 수조차 없었다.
너에게, 이제서 펜을 들어본다.
외로운 석양이 대지에 물들면 너는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을 때 높은 산 안개가 자욱하게 어린, 너의 그날들이 떠오를까.
아직 너에 대한 응어리가 내 안에 고요히 숨죽이다가 불현듯 폭풍처럼 휘몰아치면 그날의 기억들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해. 언제나 이 기억들이 내게서 사라질까,
어느 한 기류의 사상이 우리 시대에 불을 지폈던가.
난 그날의 기억에서 해방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너는 내 주변을 떠나질 않아.
너는 그토록 매혹적이었던가를, 너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나의 기억들은 내 영혼의 중심부를 휘어잡았다.
너는 여전히 8차선 노을 진 도로에 엎어져 내게 손을 내밀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내달렸어.
지리멸렬한 너와의 사랑이 언제나 막을 내릴까,
그래, 난 너를 소유하지 못했어.
한때 도시 뒷골목 지린내나는 후미진 여인숙 옆 쓰레기통에서 널 찾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조차 넌 이 땅에서 소유할 수 없는 열망이라는 이름뿐이었어.
내가 가지려 하면 너는 붙잡을 수 없는 사랑처럼 한걸음에 도망가 버렸지.
암울한 시대에 너와 나의 극적인 만남이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었잖아.
너와는 끝내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겠지.
언젠가부터 대지 위에서 너와의 사랑은 허상일 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잖아.
널 소유하지 못해서 슬퍼.
널 향한 내 열망이 너무 큰 것이었을까,
삶에서 넌 마지막 내 곁을 지킬, 민들레 같은 사랑이었잖아.
(민들레꽃 앞에서, 아름다운 날들의 방황이란 말조차 금기시 된 것처럼, 그조차 내겐 사치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