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千日)의 거짓말

by sally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경춘선 급행기차 안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는 기차문 출입구 앞, 간이의자(개인소지용)에 항상 앉아 있었다. 기차문이 열리면 출근길 탑승하는 사람들 때문에 비좁은 공간에서 말쑥한 차림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는 나와 동일한 날, 동일한 시간대에 출근 기차를 탔고 투명한 중간문을 사이에 두고 그는 출입문쪽 입석용 간이의자에, 나는 안쪽 칸으로 예매한 좌석에 앉았다. 출발지점과 도착지는 그와 달랐다. 나는 청량리에서 먼저 내렸고, 그는 기차의 마지막 역인 용산까지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대체로 땅이나 허공을 응시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의 얼굴이라든가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지는 않았다.


봄빛이 기차역 처마 끝에 매달렸을 때, 무심한 나는 그날 아침도 습관대로 항상 같은 플랫폼 위치에 서서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역내에 울려 퍼졌고, 기차가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달려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 틈에 끼어 맨 마지막에 들어갔을 때, 순간 그의 눈빛과 강렬하게 부딪쳤다. 찰나에 그의 모습은 3년 전 이별했던 y를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잠깐 움직였던 그의 동작도 무척 낯익은 것들로 다가왔다. 그 이후부터 우린 기차문이 열릴 때마다 서로를 기다렸다는 듯이 눈빛을 마주하며 반년이란 시간을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지나쳐왔다.





# 3년 전 도심지 카페, 가을 풍경이 있는 금요일 퇴근 후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왜, 이해 못 하겠어 내 말을?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는데, 너한테 이젠 질려버렸다고. 더 이상 내게 미련 갖지 마."

"그동안 내가 믿었던 당신이 맞아요? 우리가 만났던 3년의 세월은 뭐가 되는 건데? 내년 봄에 결혼하자고 약속한 것은 새빨간 거짓이었어요?"

"사랑이란 감정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이젠 너의 모든 게 싫어, 싫다구."

"당신은 내 사랑을 기만했어요. 내 사랑이 벌레만도 못해요, 당신 앞에서."


y가 내밀었던 테이블 위에 청첩장을 그의 얼굴 앞에서 가로로 쭉 찢으며, 난 거칠게 행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맥이 풀린 듯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는 체념한 듯 찢어진 청첩장을 두 손으로 모았고, 가느다란 금테안경 너머로 그의 눈은 기만한 사랑보다는 오히려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때 그의 기만과 슬픔이 담긴 불일치를 그저 속절없이 믿고 말았다. 그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먼저 그에게 등을 보이고 가리라 생각했고, 주문한 커피값까지 계산하고 그대로 카페문을 밀고 나왔다.


그 뒤로 그가 내밀었던 청첩장에 나온 이름의 직장 동료와 결혼했다는 소문만 돌았고, 나는 그에 대해 여러 메신저들을 삭제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 관한 소문을 알 순 없었다. 그토록 애절했던 서른 살에 시작했던 사랑이 남기고 간 자리는, 공허했고 허무한 공간만 내 안에 남겼다. 난 3년 동안 그를 잊었다 하면서도, 사계절 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면서도 내 볼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강렬했었고, 지독했던 사랑은 내 발가락 끝까지 자취를 감추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고,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에 갇혀 새벽녘 숨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수분을 잃고 시든 꽃이 된 사랑 앞에, 난 절망이란 철창에 3년이란 세월을 가두고 말았다.





가을빛이 바스락거리며 뒹구는 낙엽 위로 쏟아지던 아침,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여전히 간이의자에 앉은 y를 닮은 그 사람을 지나 중간문을 열고 예매한 창가 좌석에 앉았다. 청아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 눈가가 시큰해졌지만(y가 생각났다) 책을 꺼내어 조금 읽다가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난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비어있던 옆 좌석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무심하게 시선을 책에서 저 멀리 산등성이에 두었을 때, 옆 좌석 남자가 책 위로 쪽지를 살며시 남겨놓고 일어섰다. 나는 쪽지를 쳐다보았고 바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남자가 간이의자에 앉았다. y를 닮은 그 남자였다. 나는 고이 접은 작은 쪽지를 열어보았다.

'처음 본 순간, 제게 사랑이 와닿았습니다.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번주 토요일 춘천행 기차를 타고 김유정 문학촌 앞, 정오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수'입니다."

나는 순간 놀랐고 당황했다. 필체가 내가 사랑했던 y와 똑같은 것이었다. y와 나는 주말마다 춘천행 기차를 타고 김유정 문학촌에 자주 들렸었고, 우린 그 곳에서 문학에 대한 공유된 것들을 함께 했었다. 순간 나는 간이의자의 그 남자를 y라 생각했다.

돌아온 토요일에 만사를 제쳐두고 김유정 문학촌 앞으로 그를 만나러 나갔다.

김유정 역 처마에 정오의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을 때, '수'는 나를 보고 흰 치아를 내보이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의 환한 미소도 y와 닮은 것이어서 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고, 우린 자연스럽게 문학촌 내부를 나란히 걸었다.



"초면에 실례가 되었을 텐데요. 사실은 그쪽 분하고 제가 사랑했던 여자 친구와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보았습니다."

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을 때 코를 만지작거렸다. '수'의 모든 것이 y와 쌍둥이 형제처럼 너무나 닮아있어 나는 기겁을 할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여자 친구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요?"

인도를 끼고 있는 작은 시냇가를 걷다가 그가 걸음을 멈추고 하얀 들꽃에 시선을 두었다.



"사랑했던 여자는 나와 다른 세상에 살지요."

그는 슬픔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고개를 들어 등성이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우린 문학촌을 거닐면서 나지막이 가을 풍경을 즐겼다.

반나절 동안 '수'와의 문학촌 작은 여행은 마치 y와 함께 있던 시간처럼 여겨질 만큼 내 마음은 진정되지 않고 계속 흔들렸다. 사실은 오늘이 y와 이별한 지 천일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휴대폰 달력에 그와 헤어진 이후로 날수를 체크하던 버릇이 있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겠죠?"

저녁노을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y와 처음 만난 날처럼, 옅은 미소를 띄우며 네, 그럼요. 물론이죠.

우리가 헤어질 무렵 김유정 역에 다다르자 하얀색 들꽃이 아련하게 피어있길래 나는 잠시만요, 하고 그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으나 붉게 물든 그의 얼굴,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넋이 나간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수'를 기다렸으나 그곳엔 붉게 물들 노을만이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차 안 안내방송이 들렸다.

"다음 역은 청량리역입니다. 두고 내리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떠보니 펼쳐진 책이 덮여있었고, 창밖은 여전히 가을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중간문 밖에 간이의자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중간문을 열고 그 자리 앞에 가서 섰다.

간이의자도 없고, 그 남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후 y의 여동생이란 사람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오빠가 며칠 전 지병으로 사망했어요. 유서에 전해달라는 물건이 있어 연락 드렸습니다. 물건 중에 찢어진 청첩장은 오빠가 내게 부탁했던 가짜 청첩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