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엄마 미칫나?"
우리집은 언덕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땀으로 흠뻑 젖어 대문으로 들어섰다. 거실 앞 데크 위에서 절단돼서 짧은 팔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는 시어머니의 뜻대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풀을 뽑고 있는 엄마를 보고는 버럭 소릴 질렀다.
난생처음이었다. 나도 놀래서 얼른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버렸다. 신발을 벗다말고 다시 나가보니 엄마는 벌써 보이지 않으셨다.
사돈 어려운줄 모르는 시어머니와 딸 데리고 사는 사돈이 너무 어려운 엄마.
작은 거 하나라도 딸 일손을 거들기 위해 그러셨단 걸 알면서도 그 광경을 보고 잠시 이성을 잃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석달즘 지났을까. 어머닌 자전거를 타다가 레미콘 트럭에 받쳐 두 팔을 잃었다.
일년 열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엄니도 나도 견디고 집으로 온 날이었다.
-야야 비니루 장갑 두장 끼고 와봐라
주방에서 일회용 비닐 장갑 두 장을 가지고 엄니가 부르시던 화장실로 가니 속옷까지 내린 엉덩이를 내밀며
-똥이 안나온다 파봐라~
간병생활 1년을 함께 견딘 며느리에게 도대체 미안함이나 고마움 같은 게 있긴 한걸까. 아들가진 유세를 이리도 하실까. 그 아들이 대통령이라도 되는걸까. 아니면 며느리가 한참 기운다고 느끼시는 걸까.
그도저도 아니면 딸인줄 아시는걸까.
작은 마당 한쪽에 정화조 뚜껑이 있는데 보기가 싫어 커다란 장독대 뚜껑에 물을 받아 부레옥잠 몇 개를 띄워두었더랬다. 물이 귀한 도시의 길고양이들이 가끔 와서 목을 축인다는 걸 알고부터 사료도 챙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암코양이 한마니가 새끼를 낳았고..마당에서 함께 육아를 도왔다.
-야야 저놈들 달성공원(대구에 있는 동물원)에 갖다줘라
-에이 어머니 공원에서 무슨 고양이를 키우노
-아니 사료값 드는데 호랑이 밥으로 가져다주라마~
엄니가 사고가 나기 전엔 늘 조청을 닳여서 고추장을 만들었다. 아기처럼 먹이고 입히고 양치질까지 해드려야 하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서 가게에서 파는 조청을 사왔다. 그걸 본 엄니는 다시 환불해오고 조청 끓일 엿질금을 사오라고 하셨다. 올해는 그냥 사온 걸로 만들겠다고 하니 당신이 병신이 돼서 이젠 말도 안듣는다시며 방문을 걸어잠그고 식음을 전폐하셨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 손에 식사를 챙겨 엄니방을 두들기니
-말 안듣는 며느리 말고 요양원으로 보내도고~
하셨다. 나도 엄니 들으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집에서 제일 먼 요양원으로 알아봐줘!
기억나는대로 우선 몇가지 흉을 봤지만 어찌 전부 기억하고 살면 나는 제명에 못살았다.
식은밥은 헌밥이라고 귀신같이 알고 드시지 않는 엄니밥을 푸면서 남편에게 보란듯이 말했다.
-여보 내가 왜 엄니 밥을 꾹꾹 눌러 담는지 아나?
-마니 묵고 살찌라고?
-아니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하하하 침이라도 뱉어뿌라
둘다 버릴 수 없는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늘 유쾌하게 내 편이 되어준 남편.
고추장 사건날도 남편은 우리집에서 제일 큰 수트케이스를 가지고 엄니방으로 가서 짐을 쌌다.
-뭐뭐 넣으꼬 엄마. 어데가면 며느리만큼 엄마 성질 받아주는데가 있노?
엄니 허세를 사정없이 뽑아버린 남편이었다.
나는 대구집에서 엄니와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은 안동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주말부부로 보냈다.
남편도 주중엔 홀로 지내느라 힘들었을텐데 주말엔 어김없이 엄니를 모시고 1박2일 여행을 다녔다. 효자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중 절반을 아내를 배려한 일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늘 한발 늦다.
그런 엄니에게 치매가 찾아오고 어린아이가 됐다.
내가 아버님 병수발한 것도 잊고 당신 곁에서 15년 고생한 사실도 잊고 며느리란 것도 잊고 그런 아들도 잊었다. 억울했다.
엄니는 내가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하면 그러셨다.
-잘 놀다와 부모 팔아 친구 산다캤다 친구가 젤이여.
당신 아들 자랑을 해드리면 또 그러셨다.
-엄니가 잘 키워서 내가 잘 쓴다
-그건 니 복이지 내 복이 아이다
나는 안다. 울엄니 정신이 맑았으면...당신 스스로 시설로 가셨을 거라는 거.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면 몇도일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는 온도를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