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를 굽다 보면 계란 흰자만 남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전란을 사용하지만 노른자만 쓰는 레시피도 있기 때문이다.
남은 흰자는 버리기 아까우니까 모아두게 되는데 이걸 어쩌지 싶었다.
처음엔 호두파이 필링 만들 때 계란을 한판씩 쓰니까 거기에 같이 넣어 소진시켰다.
나중엔 이걸로 따로 만들게 없나 하다가 생각해 낸 게 머랭쿠키였다.
계란 흰자랑 설탕만 있으면 되니까.
파이집엔 품목이 파이 종류 밖에 없다. 유일한 다른 품목이 머랭쿠키다.
첨엔 서비스로 드릴 목적이었다.
간혹 손님들 중에 대놓고 서비스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여러 판 주문하시는 손님들께는 먼저 챙겨드리지만 호두파이 한판 파는데 호두 미니 4500원짜리를 드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뭐가 남는담.
그래서 그런 분들껜 가볍게 머랭쿠키를 하나씩 드리면 어떨까 싶었다.
나중엔 손님들이 그러지 말고 팔라고 했다. 이거 밖에 나가면 엄청 비싸다면서.
그냥 남는 재료 소진시키려고 만드는 거라 색소도 안 넣고 그냥 큼직큼직하게 짜서 굽는데 그런 건 파는 데가 없나 보다.
서비스로 몇 번 드렸더니 어떤 사람은 미니파이 하나 사가면서도 가져갔다.
참나... 또 그 꼴은 그냥 못 봐서 결국 가격이 붙었다. 천 원.
몇 년 전 계란 가격 폭등 이후 지금은 1500원이다.
근데 이게 우리 동네 초등학생들의 애정템이 되어버려서 애들이 용돈을 모아서 머랭쿠키를 사러 오기 시작했다.
방학 때는 파이집이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어떤 연년생 자매는 용돈만 생기면 머랭쿠키를 사러 오는데 너무 귀여웠다.
지나다가 창문 밖에서 눈이 마주치면 배꼽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손을 흔들어 주니까 그게 또 좋았던지 어느 날은 내가 쳐다볼 때까지 둘이 서있기도 했다.
새해가 된 이맘때쯤에 그 아이들이 또 인사를 하길래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인사 잘해서 주는 새해 선물이라고 하면서 머랭쿠키를 한 봉지씩 줬다.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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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머랭쿠키를 집에서 만들어 보겠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냥 파이 언니네 머랭쿠키를 사 먹기로 했단다.
(파이집 하다 보면 초6한테 언니 소리도 듣는다.)
혹시 집에서 머랭쿠키를 만들어 보실 분들을 위해 내 방식을 알려드릴까 한다. 파이 레시피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머랭쿠키 팁은 드릴 수 있다.
머랭쿠키는 레시피라고 할 게 없다.
흰자랑 설탕만 있으면 된다.
인터넷 찾아보면 1 : 1 비율로 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너무 달아서 1 : 0.7 비율로 한다.
흰자가 100 이면 설탕은 70 만 하면 된다.
오븐은 컨벡션 기능이 있으면 좋다.
어차피 머랭쿠키는 말려주는 개념으로 굽는 거라 바람이 슝슝 말려주면 골고루 잘 마른다.
컨벡션 기능을 돌려보면 머랭쿠키 구울 때 수증기가 뿜뿜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근데 만약 나는 컨벡션 기능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한 번씩 오븐 문을 열어서 증기찬 걸 빼주면 된다.
골고루 익게 팬을 돌려줄 때 한 번씩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온도는 100도~120도 사이의 낮은 온도로 예열해 준다.
온도가 높으면 속까지 마르지 못한다.
겉만 익고 빨리 색깔이 변해버려서 속이 파삭한 머랭쿠키를 만들 수 없다.
속이 덜 말라서 찐득하거나 나중에 금방 눅눅해져 버린다.
자, 이제 준비가 됐다면 머랭을 쳐보자.
계란 거품을 치면서 설탕은 세 번에 나눠서 넣어준다.
처음부터 다 털어 넣으면 머랭이 안 올라온다.
흰자 거품이 맥주 거품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설탕을 나눠서 넣는 거다.
어차피 흰자는 수분이 많기 때문에 설탕이 안 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보통 영상을 보면 뒤집어도 안 흘러내릴 정도로 머랭을 치라고 한다.
너무 과할 필요는 없고 매끈해 보이고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쳐주면 된다.
여기서 나의 팁.
베이킹하는 분들은 집에 럼주가 있을 거다. 그걸 조금만 넣어주면 계란 비린내가 잡힌다.
다른 리큐르도 가능하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머랭이 푸석거리기 쉽다. 그래서 첨부터 넣지 말고 마지막쯤에 넣어서, 마무리로 몇 번 더 섞어주고 얼른 짤주머니로 옮겨서 팬에 원하는 모양으로 짜준다.
그다음 예열해 둔 오븐에 넣어 1시간 반~2시간 동안 100도 정도 온도에서 말려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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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동생들이 실패하는 이유.
1. 머랭칠 때 팔이 아파요.
머랭은 집에 있는 계란찜 만들 때 쓰는 작은 거품기로 해서는 좀 힘들다.
손으로 칠 거면 헤드 큰 제과용 거품기로 하는 게 좋고 가능하면 핸드믹서를 추천한다.
만약 집에 있는 작은 거품기로 할 거면 머랭을 조금만 만드는 게 좋다.
집에선 계란 흰자 1개~2개 분량이면 되는데 너무 욕심내서 그 이상을 쓰면 머랭 올리기도 힘들고 가정용 오븐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수도 있다.
2. 꺼냈는데 쪼그라 붙어요.
머랭이 덜 익었는데 꺼내서 그렇다.
이름이 머랭쿠키라고 쿠키 굽는 거처럼 짧은 시간 굽는 걸 생각하면 안 된다.
오래오래 오븐에서 말려야 한다.
크기를 작게 짜도 1시간 반은 구워야 된다.
온도를 높게 하면 색깔이 빨리 나오고 그러면 겉이 탈 거 같아서 꺼내버리게 된다.
결국 속은 안 마르고 겉은 탄 상태가 될 수 있다.
낮은 온도에서 오래 굽기! 기억하자!
3. 계란 비린내가 나요.
이 문제는 신선한 계란을 쓰는 게 좋고 아까 말한 대로 럼주 같은 리큐르를 조금 넣어주면 해결된다.
술이라서 알코올이 걱정된다고?
100도 넘는 온도에서 2시간가량 말리는 동안 다 날아간다. 리큐르의 향만 남기고 알코올이 계란 비린내랑 같이 증발해 버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집에 있는 소주를 넣어 될까? 쓴맛이 남을지도 몰라서 그건 비추한다. 그건 사실 나도 안 해봤다.
4. 금방 눅눅해져요.
얘네는 말린 거라서 금방 다시 습기를 먹기 쉽다.
보통 베이킹을 하면 제품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식힘망에 널어놓게 된다.
머랭쿠키는 그러면 안 된다.
오븐에서 꺼내자마자 바로 포장해줘야 한다.
어차피 가볍고 작아서 포장하는 동안 금방 식는다.
금방 공기 중 수분을 먹으려고 하는 애들이니까 비닐에 담아 밀봉하던지 밀폐용기에 담아두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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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나의 머랭쿠키 팁이다.
베이킹 품목 중에서 가장 쉽고 재료도 간단한 머랭쿠키에도 잘 굽기 위한 비법이 있다.
남들이 간단하게 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노하우가 있다. 쉽게 보고 덤볐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생각되는 주변의 소소한 일에도 감사한 마음이 필요하다.
작은 머랭 쿠키에도 삶의 진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