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의미일까?
요즘 심심찮게 죽음이 주제가 되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떤 이는 당연한 결말이니 지금부터 삶을 가볍게 정리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주제라며 외면하고 싶어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한 경험이 적지 않다.
아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략 2-3살 무렵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던 것 같다. 첫 번째 죽음의 기억은 젤리포(제품에 대한 내 기억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개별포장된 젤리인데 껍질을 떼면 달콤한 국물이 흘러내려 늘 입을 데고 뚜껑을 떼었던 것 같다. 과일 맛이 다양했고 한 봉에 3개정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와 만화영화이다. 엄마와 아빠는 몇 일간 얼굴보기가 힘들었고 나와 남동생은 아픈 심촌의 돌봄 아래서 맛있는 젤리포를 먹으며 비디오 테잎을 틀어 만화영화를 실컷 보았다.
두번째 죽음의 기억은 ‘당혹감‘이다. 내 기억이 정확치 않지만 초등 고학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막내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황당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때가 그때말고 또 있을까? 것도 동네 대중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우리 삼촌은 고작 20살이었다. 나는 삼촌이 대단한 어른인줄 알았는데 지금보니 철딱서니 없는 나이였다. 그치만 초등시절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간질을 앓고 계셨기에 평탄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하셨다. 엄마가 결혼을 하자 외할머니는 5학년짜리 막내 아들을 서울에 있는 누나집으로 보내버리셨단다. 불쌍한 우리 엄마, 아빠. 부부 사이에 막내 처남을 두고 잠을 잤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굴곡있는 짧은 생을 사신 삼촌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동네에서 수근수근대던 그 소리들. 하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던 목욕탕이었다. 지나갈 때 마다 떠올랐다. 같이 떡볶이를 사먹고, 어린이 회관 무지개 극장에서 우뢰매를 같이 보던 내 어린 시절의 어른 친구. 장례식 이후로 자꾸 꿈에 나타나 같이 가자 하는 통에 한동안 삼촌 사진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미소가 소름끼치는 공포가 되어버렸다. 밤에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어 한참을 고생했던 것 같다.
세번째 죽음은 고통과 슬픔, 무력감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20여년을 동고동락하며 나의 전 생애를 함께 해 온 아픈 삼촌의 죽음. 얼마나 영화같은 이야기였는지. 수능 시험 일이주 전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한양대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대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단 한번만 이라도 설악산을 모시고 가보고 싶었었는데. 내가 좀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온통 유리로 된 집을 지어 삼촌을 살게 하려고 했는데. 날마다, 계절마다 모든 풍경을 눈에 담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개나리 꽃을 꺽어 오고, 눈을 뭉쳐 들고 들어오는게 고작이었다. 평생 침대에 누워 그 작은 공간에만 갇혀 지낸 가여운 내 삼촌. 티비와 굳어버린 손에 묶어 놓은 전화기가 유일한 외부 세상과의 소통 창구였다. 그래서 신문을 정말 열심히 읽으셨고 모르는게 없는 척척박사셨다.
시험을 보러 가던 날, 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렸는데 삼촌이 원한다고 했다. 내가 대학가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다행히 병원 근처 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퇴실명령을 기다리는데 방송이 나온다.
“000학생은 1층 행정실로 내려오세요.”
에잉~!!!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후다닥 가방을 챙겨 내려갔더니 아빠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우린 손을 잡고 무조건 뛰었다. 숨이 붙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흠뻑 젖을 만큼 뛰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그냥 그 길로 눈을 감고 싶었다. 딱 1분만 더 기다려주지…딱 한번만 목소리 들려주지…왜? 왜? 내가 그래서 시험보러 안간다고 했는데..왜?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느껴지는 그 공허감이란.
안방에 늘 삼촌이 누워있던 더블 침대가 아직 있었다. 나는 식탁에서 밥을 먹는게 소원이었는데 우린 늘 삼촌 침대 앞에 상을 펴고 삼촌이게 밥을 먹이면서 같이 먹었기에 식탁은 가질 수 없었다. 이젠 식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도 안 기뻤다.
죽음이라는 것이 아주 찰나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 참담한 심정을 뭐라 설명하지?
삼촌을 보내고 우리 가족들은 각자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던 것 같다. 자그마치 20년을 매일, 매 순간 함께 했던. 나와 동생에게는 부모님보다 더 가까운. 그 여파가 참 오래갔다. 그래서 였을까 크게 의미있는 일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고 그 이후로도 많은 죽음과 장례식을 경험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때마다 손님들 대접할 음식을 챙기는 등 일도 참 많이 했다. 20대가 지나기도 전에 장례식장을 10번도 더 다녀본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해 접하고 생각을 많이 해본 탓인지 난 죽음이 무섭지 않다. 오히려 안식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남은 자의 몫이라는 마음이다. 남은 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라면 문제이겠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물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잠을 자면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다르듯 우리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순간들도, 모습들도 분명 각양각색일테다. 어떤 모습이든 서로 잘 받아들이자. 그 상황이 최선이었다 여기며 차라리 지금에 더 집중하자. 알수도 없는 그 시점을 고민하고 걱정하기 보다 오늘을 충분히 누리자. 내 마지막이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나의 남은 이들이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린 곧 다시 만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