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에 대하여
요즘 사랑하는 아들들의 진로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거의 내가 이야기를 꺼내고 꺼낸 이야기가 끊어질까 연연하며 질질 끌고 가는 수준이지만 우리 가족 최고의 관심사이다. 진로를 두고 어려서 부터 계획을 세워 살아오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때문인지 아이들 어려서부터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나는 한참 진로를 고민해야 했던 때에 별 다른 생각 없이 지냈다. 뭔가 이유가 있거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몰라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예 백지같아서 그랬다.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던 막막함.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너무 좋겠는데 그저 대학을 가는 것이 인생최고의 목표인것처럼 사는 삶이 내게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때 인적성검사에서 반사회적 성향이 높게 나왔었는데 내가 삐딱해서 그랬던 걸까?
'될 대로 되라지.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고, 특별히 되고 싶었던 것도 없었다. 동시에 어느 순간 힘들어진 가정형편에 대한 불안함이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렇다고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거나 어딘가로 내쫓겼다거나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쫓겨 피곤에 지쳐 보이는 엄마를 볼 때마다 그저 죄스럽기만 했다. 짐이 된것 같은 죄책감에 엄마에게는 끝없는 미안함을 느꼈다면 아빠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불만만 쌓여갔다. 불만이 산처럼 커지자 아빠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뚫어지기 시작했다. 아빠탓을 하고 싶었나보다. 탓할 거리가 필요했으니까. 내눈에 그리 완전해 보이지 않았던 아빠에 대한 비뚤어진 편견으로 눈이 완전히 가리어지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마음이 달라졌다. 아빠랑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고, 출근하는 아빠를 붙잡고 온 얼굴에 침을 발라가며 뽀뽀를 퍼붓던 내가 아빠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 늘 머리가 아픈 사람, 조금만 화가 나도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사람, 뭐든 자기 맘대로에 힘으로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 듣고 싶지 않았고, 그런 아빠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내 모든 에너지를 부정적인 감정들에 온통 쏟아부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미래를 계획한다든가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무엇인가 실천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다. 내가 뭔가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럭저럭 모범생의 모양을 하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 누구도 나를 보며 속에 칼을 품고 사는 아이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학교 성적은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서 중상위권쯤의 성적을 대강 유지하며 중고등학교 시간을 보내었다. 대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처음엔
"저 대학 안 가고 엄마처럼 미용사 자격증 따서 엄마 미용실에서 일할래요."
그랬다. 근데 대학은 가는 게 좋겠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대학에 가면 정말 인생이 확 바뀔 만큼 좋을까 싶어 그러마겠다고 했다. 이과도 문과도 아닌 예체능 전공반으로 간 것이 신의 한 수 였다. 덕분에 내신이 1 등급이 나왔고,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한 경험을 인정받아 선행상을 수상한 경력을 더해 수시로 대학을 지원했다. 경영학부가 좋을 것 같다고 내가 결정하긴 했던 것 같은데 대학교를 누가 결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원서를 접수했고 면접을 보기로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이었기에 아침 일찍 동서울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갑작스런 폭설로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고 다행히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에 가장 존경하는 경영인이 누구냐고 물어보셨던 것만 기억난다.
"저에게는 저희 어머니가 가장 존경스러운 경영인입니다."
그랬다. 교수님들이 웃으시며 이유를 물어보셨던 것 같다. 미용실을 한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던 엄마를 나도 모르게 존경하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별 어려움 없이 합격을 했다.
집을 떠나 대학교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을 가지고 입학을 했지만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내 삶은 크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여전히 여러 가지 얼굴을 갈아 끼우며 적당히 맞추고 살아가는 내게 대학교 생활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냥저냥 중간은 하면서 생활을 했지만 대학교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2번의 휴학을 했고, 기숙사도 자취방도 다 싫어 급기야 집에서 통학을 하며 겨우 졸업을 했다.
너무 답답해서 엄마를 따라다니며 100일 작정 새벽기도도 해보고, 유명하다는 기도원 원장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다. 정신병원이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괜히 잘못하는 일 같아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심정이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절망적인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마음을 먹기가 종이 한 장 옮기는 문제처럼 가볍지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학교에 가기 싫어 꾀를 내었다. 취업을 하면 돈도 벌고 수업에도 안 갈 수 있다는 것. 곧바로 인터넷 구인 사이트를 뒤져서 집에서 가까운 아주 작은 무역회사에 이력서라는 것을 넣었다. 역시 큰 문제없이 취업이 되었다. 나름 즐거운 회사생활을 했다. 크게 나를 괴롭히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작은 회사라 별로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뭐든 잘한다 해주시는 사장님 덕분에 의욕이 막 샘솟아 정말 열심을 다해 일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좋았었는데 길지 못했다. 사장님이 중국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하시면서 회사일에서 손을 떼고 다른 분이 회사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는데 점점 기울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정도였다. 결국 월급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져서 겨우 밀린 월급을 정산받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뭔가 좀 큰 포부를 가지고 취업에 임했었다면 어땠을까? 가까운 게 최고라며 집 근처의 외국계 회사 계약직에 이력서를 내었고 무난히 취업에 성공했다. 6개월짜리 단기 계약직이었지만 좋았던 것 같다.
결혼에 취직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그동안 쓴맛인 줄 알았던 것들이 실은 달콤 쌉싸름한 맛이었음을 결혼을 하고서야 알았다. 길고 긴 시간을 돌아 이제야 나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았다. 내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헛된 꿈만 꾸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꿈을 꿨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제라도 내 자리를 찾게 된 것이 아닐까?
지금 나는 글 선생, 한국어 선생, 폴란드어 선생이 되었다. 지금 가장 행복하다. 마침내 가장 나 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지나간 시간들은 모두 소중하다는 마음이 든다. 그 시간들이 오늘,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음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라고. 언젠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날이 분명 올 거라고.
꿈 꾸어라! 꿈을 꾸는 한 젊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