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서울 우리 집에는 늘 군식구들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를 군식구라고 생각했을 만큼 여러 사람들이 들락날락 함께 살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 환자가 되어 침대에만 누워 계셨던 둘째 외삼촌과 이모, 큰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도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우리 집은 지하방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큰 외삼촌이 결혼을 하시기 전까지 사셨던 것 같다. 여러 친척들과 어른들의 친구들까지 중간중간 한 공간을 차지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 지방에 사시던 외조부모님도 짧게는 며칠에서 한 달 이상씩 묶다 가시는 일이 매우 잦았다.
엄마 나이가 많아 봐야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을 텐데 그 나이에 그 많은 식구들의 밥을 지어대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살림을 돌보는 일을 오롯이 혼자 해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제는 알겠다. 그때 엄마는 심지어 전업주부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해낼 수 없었을 일이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와 남동생이 엄마에게는 큰 일 거리였었을까? 기쁨이며 동시에 짊어져야 할 무엇이지 않았을까.
남동생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장중첩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몸이 매우 약했었다. 나와는 달리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남동생은 늘 말라있었다. 뾰족한 턱이 나는 무척 부러웠다. 그럼에도 막내 특유의 저돌성과 착함이 있었다.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한, 주변 환경 변화에 민감한 아이였다. 그렇게 예민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오래도록 야뇨증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누구보다 엄마가 가장 괴로우셨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젖어있는 이불 위에서 눈을 뜬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그 괴로운 심정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아무런 기억도 없이 푹 자고 일어났는데 도대체 왜 아침마다 내 이불은 젖어 있는 것인지. 나는 대체 왜 이런 것일까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다.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봐도 결국 잠이 들고 아침이면 같은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안 되는 구나라는 절망감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딘가 고장이 나 있었던 건데 그 아픈 나를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무엇이 내게는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또 일거리를 주었구나.'로 시작했다.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이런 고민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나 조차도 위로해 주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미안하다 전하고 싶다.
" 너 참 많이 아프고 힘들었구나.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 나를 용서해 줄래?"
지금이라도 나의 이런 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떤 날은 이불에 오줌을 싸고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오는 동안 아무도 내 방에 들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내가 돌아왔을 때 그대로 이불이 말라있기를 바라며 이불을 개지 못하고 바닥에 반듯하게 잘 펼쳐놓고 나갔었다. 운이 좋아 말라있는 날은 지린내를 조금 맡으며 잠을 잤고, 말라있지 않은 날은 최대한 축축한 곳을 피해서 잠을 잤다. 물론 냄새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은 날은 젖지 않은 이불 위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많은 날은 축축한 이불 위에서 절망감에 휩싸여 눈을 떠야만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고쳐 보겠다며 안 다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열심을 내셨고 그때마다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내 몸이 나을 때가 되었던 건지 그도 아니면 정말 그 한의사분이 실력이 좋았던 건지 중학교 때쯤 사촌오빠의 장인어른이 하시는 속초 한약방에서 약을 한재 지어먹고 지금까지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내 안에서 나를 괴롭혔던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운 마음들이 한 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가진 나는 절대 누구한테도 털어놓으면 안 된다는 마음에 괴로워하며 솔직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살아왔다. 남들 앞에서는 밝은 척, 당당한 척, 아무 문제없는 척 그런데 실상은 나 스스로를 문제가 있는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늘 마음이 아팠다. 내 비밀을 들키는 순간 모두가 나를 비웃을 거라는 공포가 늘 나를 짓눌렀다.
거기에 더해 나는 흔히 말하는 사팔뜨기였다. 병원에서는 사시라는 병명을 내게 주었고 유치원 때부터 20살까지 내내 서울대 안과를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에게 내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아이들이 나를 멀리하고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사팔뜨기라고 나를 놀려대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했던 내 말이 아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그랬다고 하더라. ( 문득 올드보이의 군만두가 떠오른다. ) 그 당시의 아픔과 고통이 어떠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이 화장실을 우르르 몰려 같이 가서 한 칸에 다 같이 들어갔었다.( 우리 학교만 그랬을까?) 어느 날 내가 소변을 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물었다.
"사 더하기 팔이 뭔지 아니?"
다들 하하하 웃기에 따라 웃었다. 나를 향한 칼날이었다는 것도 모른 체 바보같이 같이 웃던 내가 참 미웠었다. 그 시간을 지나면서 솔직해서는 안된다는 마음과 함께 실제 내 모습을 능숙하게 감추는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초등학교 때 나를 힘들게 했던 무리 중 한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입학식날 반 배정을 받고 책상에 앉아 그 친구에게 쪽지를 썼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동안의 일은 다 잊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그 친구와는 다시 좋은 사이가 되어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 같은 친한 무리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되 내 속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들.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가끔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처럼 찾아오는 헛헛한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또 잦아드는 마음이어서 그럭저럭 그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친구가 있다. 어려서는 모두를 다 친구라 불렀는데 나이를 이만큼 먹어서 그런지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좀 달라졌다. 아이에게도 그냥 반친구와 진짜 친구는 다른 거야라고 이야기해 줄 만큼.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친구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많은 추억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지 언젠가 꼭 말해줘야지. 지금은 왠지 못하겠다. 그녀에게는 내가 어떤 존재일지 모르겠다. 나도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면 참 좋겠는데.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를 너답게 만들어주는 그들을 만나야 돼. 억지로 너를 바꿔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알면서도 너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과는 절대 관계하지 마. 네가 너다울 때 가장 당당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그리고 너희들도 꼭 그런 사람이 되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