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BTI를 모르는 ENTP Apr 10. 2021

"난 '바보상자'예요"

그딴 TV 못 보게 하더니, 연예 관련업을 하네요


어릴 적 당신의 TV는 어땠나요?


내겐 금기였어요.

엄마는 '바보상자'라며 둔탁하게 생긴 금성테레비를 툭툭 때렸죠.

아빠도 예능 프로그램은 국민학생에겐 우스꽝스럽고 유해하다며 가끔씩 경고를 했어요.

눈알 굴리는 개그맨 아저씨도, 방귀로 실험하는 것도 다 내겐 신세계였는데!


'TV=바보상자'란 공식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어요.일종의 제약이었고, 강박이었죠.

1990년대엔 그랬어요. 책 읽는 건 고귀한 거고, TV를 보는 건 나태한 거라고.


본능을 이길 순 없는 거죠.

엄마가 생업을 위해 일하러 나간 시간에 몰래.

이빠진 아빠가 제대로 복귀하겠다고 나간 시간에 몰래.

그리고 할머니 찬스를 타서 그 시간에 대놓고, TV를 즐겼어요.

혹시나 날 바보로 만들면 어쩌지, 내게 유해하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은 아예 안드로메다에 쳐박아놨고요.

아니, 막말로. 그냥 '바보상자' 되면 안 돼요??????!!!?



2021년, 마흔살입니다.

저 가고 싶은 대로 인생이 흐르다보니, 전 연예 관련업을 하네요.

몰래봤던 '사랑을 그대 품안에'도.

몰래봤던 '가요톱텐'도.

또, 몰래봤던 '경찰청 사람들' 도, 모두 제겐 이야깃거리가 됐어요.


아, 맞다. 몰래봤던, '특종 tv 연예'도요.

그날 나와서 10점 만점에 평균 6점을 맞고 머쓱하게 웃었던 서태지와 많이 달라진 아이들이 제겐 '예단하지 마라'의 표본이 됐어요.

엄청 가시를 박던 한 가요평론가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네요. 그는 아직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


우리 아이가 유튜브를 합니다.

최근은 아니에요. 2살 때부터 뽀로로 유튜브 영상을 보여줬고, 4살 부터 패드를 알아서 움직였으니 꽤 경력직이네요. 맞벌이 부부가 주말을 그나마 '휴일'처럼 보낼 수 있는 아주 못된 방법이었겠죠?


지금은, 베테랑입니다. 이젠 아예 검색어를 입력하고, 채팅까지 하려고 해 말리는 중이네요. 아직은 '귀여워'만 쓰는 수준이지만, 혹시나 몰라서요.

예전의 나태를 반성하며 기를 쓰고 말리고 있는데도, 가끔은 생각해봅니다.

육아법이, 많이 잘못 건가요?

아니면 저도 미리 겁부터 먹은 걸까요?


처음엔 고민이 많았어요.

프랑스 아이처럼 키워야 하나, 혹은 어느 박사 말을 들어서 그대로만 권해줘야 하나, 알 수가 없더라고요.


일단 한국 국적이니 프랑스 아이처럼 키울 순 없고,

박사를 제가 밟은 건 아니니, 100% 맞다고 강요할 수 없어서.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를 곱씹었어요. 곱씹고, 곱씹어봐도 답은 자명하더라고요.


'운명(적인 기회가)이 정해져있다면, 나의 친구가 별스럽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준비들 함께해줄까.'


일단, 제가 얻은 해답은 그거예요.


"해봐, 아니면 말고. 금한다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게 해도 될 사람은 알아서 되더라고!"


우리 엄마는 TV를 미워했지만, 결국 내가 연예계 근처를 기웃거리게 된 것처럼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박사는, 남자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