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자연임을 잊지 않길

아들과 낱말카드를 하면서

by 류대표

주말 오전

주말 오전,

아들과 낱말카드를 했다.

동물, 식물, 사물 카드들.


설명하면서

"이건 하마야"

"응"

"하마는... 그냥 태어난 거야.

이유 없어. 그냥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생각했다.

하마는 목적이 없구나.

그냥 피어난 거구나.


계속

"저건 자동차야"

"응"

"자동차는 사람이 만든 거야"

"왜?"

"빨리 가고 싶어서"

그때 느꼈다.

자동차는 목적이 있다.

'빨리 가기 위해'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차이

카드를 넘기면서,

차이가 보였다.

나무 = 그냥 피어남

헬리콥터 = 사람에 의해 날기 위해 만들어짐

사슴 = 그냥 존재함

비행기 = 사람에 의해 목적 있게 제작됨


너도

그때 아들을 봤다.

"너도 그래"

"응?"

"너도 그냥 태어난 거야"

"왜?"

"이유 없어. 그냥 있는 거야.

뭔가를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아들의 질문

한참 후,

아들이 물었다.

"아빠, 동물원 동물들은

우리가 보려고 있는 거잖아?"

순간 멈췄다.


혼란

그렇다.

동물원은 사람이 만들었다.

동물을 보기 위해.

그럼 동물원의 사자는?


생각의 시작

며칠을 생각했다.

동물원은,

사람이 만든 공간이다.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 안의 사자는,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다.

그냥 태어난 존재다.

목적 없이 피어난 존재가,

목적 있는 공간에 갇혔다.


나를 돌아봄

그때 문득,

나를 봤다.

나도 그런가?

나도 그냥 태어났는데,

'목적 있는 존재'처럼 살고 있나?


과거의 나

돌이켜보니,

나는 평생,

목적을 찾았다.

"나는 왜 존재하나?"

"내 목적은 뭔가?"

"나는 뭘 이뤄야 하나?"

목적이 없으면,

불안했다.


사회가 가르친 것

세상은 계속 물었다.

"넌 뭐가 되고 싶니?"

"넌 뭘 할 거니?"

"넌 무슨 의미가 있니?"

나는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되려고' 했다.

뭔가가 되어야,

존재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함

그렇게 살다 보니,

너무 피곤했다.

항상 '되어야 할 무언가'를 향해 달렸다.

그냥 있는 게 두려웠다.

역할이 없으면,

성과가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나는 쓸모없는 것 같았다.


아들을 보며

그런데 아들을 보니,

아들은 그냥 있다.

뭔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목적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웃고,

놀고,

존재한다.

그게 충분해 보였다.


깨달음

나도 원래 그랬을 텐데.

태어났을 때,

나도 그냥 있었을 텐데.

언제부터 '목적'을 찾아야 했을까?

언제부터 '의미'를 증명해야 했을까?


동물원의 비유

동물원 동물처럼,

나도 원래는,

목적 없이 피어난 존재였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동물원'에서,

'관람용', '유용함', '목적'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나인 줄 알고 살았다.


회복하고 싶은 것

이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이전으로.

"나는 그냥 있는 사람이야"

로.

목적을 증명하기 이전,

그냥 존재하던 그때로.


현실은

물론 현실을 살아야 한다.

나는 여전히,

역할을 해야 하고,

목적을 수행해야 하고,

쓸모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이걸 알고 싶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역할 이전에,

목적 이전에,

쓸모 이전에,

나는 그냥 존재한다는 것.


아들에게

그래서 아들에게,

이것만은 전하고 싶다.

세상은 너에게 물을 거야.

"넌 뭐가 되고 싶니?"

"넌 뭘 할 거니?"

"넌 무슨 쓸모가 있니?"

그때,


잊지 마

너는 원래,

그냥 태어난 존재라는 걸.

뭔가를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피어난 거라는 걸.

역할을 하기 이전에,

목적을 증명하기 이전에,

쓸모를 보이기 이전에,

너는 이미 충분하다는 걸.


물론

물론 넌,

세상에서 역할을 하며 살아갈 거야.

목적도 가질 거고,

쓸모도 있을 거야.

그건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그게 너라고,

착각하지는 마.

역할이 무너져도,

목적을 잃어도,

쓸모없어 보여도,

너는 여전히,

그냥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야.


나무처럼

나무가,

누군가의 그늘이 되려고 있는 게 아니듯,

너도,

누군가의 도구가 되려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있는 거야.

피어난 거야.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빠도

아빠도 지금,

그걸 다시 배우고 있어.

40년을 목적을 찾으며 살다가,

이제야 알았어.

나도 그냥,

피어난 존재였다는 걸.


함께

우리 함께,

이걸 잊지 말자.

세상이 우리에게,

목적과 역할과 쓸모를 요구해도,

우리는 원래,

그냥 자연이라는 걸.


자연처럼

자연처럼,

그냥 존재해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걸.

증명할 필요 없이,

다스릴 필요 없이,

그냥 피어나면 되는 사람들이라는 걸.


아들아

아들아,

넌 그냥 있어도 돼.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빠가 보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