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9.

공포영화

by Ellen Yang


무더위가 한창인 요즘이다.

어릴 때는 덥디 더운 여름이 오면 '전설의 고향', '토요미스터리'같은 티브이 프로그램은 물론이요, 서점에도 무서운 이야기를 잔뜩 담아놓은 책들이 즐비했다. 영화관도 여름이 되면 '여고괴담'같은 국내영화를 비롯해서 '오멘', '사탄의 인형' 등등 다국적 공포영화들을 줄지어 상영하곤 했다. 그만큼 누군가로부터 듣는 여름밤의 무서운 이야기는 여름밤에 빼놓을 수 없는 즐길거리였고,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숨이 멎을 듯한 공포와 함께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곤 했었다.




내가 처음 접했던 공포영화는 '오멘'이었다. 더위에 밤잠을 설치던 어느 주말, 엄마 아빠가 보고 계시던 주말의 명화를 같이 보겠다고 호기롭게 앉았다가 '오멘'이라는 클래식 공포영화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 내 나이 여덟 살이었을 거다. 이 영화에는 나만큼이나 어린아이가 악마로 나온다. 귀신같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악령이 깃든 아이 하나로 인해 성인 여럿이 충격적인 모습으로 죽어가던 영화. 어린 나에게 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은 조용하면서도 잔잔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공포감을 주었다. 그 영화를 본 이후로 한동안 6이라는 숫자가 달갑지 않았다.


아빠가 공포영화를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공포영화의 충격적인 장면에 몸이 굳어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를 보며 '아니 우리 딸이 이렇게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니!'라고 오해를 하셨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빠는 여름이 되면 종종 동네 비디오방에서 공포영화를 빌려오셔서는 가족 와 함께 보시곤 했다. 그중 가장 기억이 생생한 영화는 단연 '폴터가이스트'이다. '오멘'이 곱씹을수록 오싹한 기분을 주는 영화였다면, '폴터가이스트'는 장면 하나하나가 즉각적인 공포로 온몸을 휩싸이게 만들었던, 아홉 살의 어린이에게 극한의 공포를 맛 보여준 영화였다. 지금 떠올리면 참으로 조악하기 그지없는 CG이지만, 티브이 화면을 꽉 채우던 크나큰 해골이 '크앙'하고 주인공 가족들을 위협하던 장면은 어린 나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 영화는 누구나 익숙하고 삶의 터전인 '집'이 배경이다. 당시 내가 이해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귀신 들린 집에 이사 가서 벌어진, 악귀들과 일가족의 잔혹한 전쟁 같은 이야기'였는데 하필 우리 가족이 드디어 반지하 집에서 방 2개에 거실과 주방이 따로 있는 큰 집으로의 이사를 코앞에 두고 있었던 시기였더랬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넓은 2층집에 이사 간다고 좋아만 하던 나는, 덜컥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이 영화의 잔상으로 인해 새집에 귀신이 들려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시름, 공포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아. 그리고 이때부터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을 왜 꼭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에 상당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열지 말라는 문은 왜 열고 들어가는 거냐고!!!)




굳이 내가 일부러 찾아가서 보진 않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생 시절에는 여름만 되면 '여고괴담' 시리즈를 포함해서 친구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공포영화들이 줄지어 개봉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공포영화의 관람객이 되었어야 했다.


학창 시절에 봤던 공포영화 중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한국 개봉과 동시에 어마무시한 관심을 끌었던 '주온'이다. 당시 나의 학과에서 친했던 동기들이 주온을 조조할인시간에 보러 가자며 의기투합했고 얼떨결에 아침 8시에 삼성역 메가박스로 휩쓸려 들어가서는 잠도 덜 깬 눈으로 토시오와 대면해야 했다. (주온을 보고 나서는 침대 공포증이 왔었다. 침대 매트리스 밑 빈 공간에서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를 막고 겨우 뜬 실눈 사이로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나로서는 돈 아깝기 그지없던 공포영화.

귀 막고 눈을 감았던 와중에도 슬쩍슬쩍 눈에 든 장면들은 (인형과 칼, 기계들에서 나는 소리, 닫혀있는 방, 어둠, 하얀 천, 학교 동상, 주변의 낯선 소음 등) 내 안에 등골을 오싹,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포인트를 꼭꼭 각인시키고 나서야 엔딩 크레디트를 올리곤 했다.




사실 난 태생이 겁이 많다. 거기에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래서 나에게 공포영화는 쥐약과 같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서 깨닫게 되었다. 한 번이라도 눈에 든 무서운 장면, 귀에 들린 무서운 이야기와 소리는 좀처럼 내 머리와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잔상이 현실에서 자꾸 떠올라 시도 때도 없이 공포심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을 완전히 지나 직장에 다니는 성인이 되고, 나의 호불호에 좀 더 자신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더는 공포영화를 보러 제 발로 영화관에 들어서는 일은 많이 줄었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와 멀어지면서 그간 오감에 축적되어 반사적으로 공포감을 불러오던 무서운 물건, 소름 끼치고 오싹한 소리에 대한 감각도 점차 무뎌졌다. 겁 많은 나에게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의로, 또는 타의로 봐왔던 공포영화.

그정도 봤으면 이번 생에서는 됐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2025.08.10.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