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장례식
얼마 전 내 짝꿍,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부고였다. 문자를 보내온 이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짝꿍의 지인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나는 나의 친할아버지 장례식장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자 장례식이었다.
나의 양가 조부모님께서는 열차, 버스 등으로 한 번에 가기는 어려운, 말 그대로 '시골'에 터를 잡고 사셨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댁 방문은 서울살이를 하던 나에게는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부모님 덕분에 사촌 부자였던 나는 명절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러 가면 사촌오빠, 언니, 동생들과 몰려다니며 산과 들에서 마음껏 뛰놀았다. 논두렁을 거닐며 잠자리나 사마귀, 귀뚜라미를 잡으러 뛰어다니기도 하고 웅덩이에서 울어대는 황소개구리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라는 동요의 실사판과 같았다. 한창 놀다가 지치면 시골집 옆 정자에 앉아서 향긋한 시골 내음을 흠뻑 담아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한갓진 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전라도 먼 시골집까지 찾아오는 손녀를 아껴주시고 예뻐해 주셨던 친할아버지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악명 높기로 유명한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아버지를 되찾고 싶었던 자식들은 서울의 유명한 병원에 모셨고, 그곳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셔야 했던 할아버지께서는 그나마 병원과 가까웠던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셨다. 하지만 병세에는 별 차도가 없었고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점차 치매라는 병에 깊이 잠식되어 갔다. 그리고 끝내 기억의 대부분이 장막에 가려져 가족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시던 할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할아버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으셨을 즈음,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댁으로 모셨다. 평생을 지내신 시골 한옥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안히 임종을 맞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거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그의 집안에서 이루어졌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건 요즘같이 병원에서 지내는 장례가 아닌, '예전 방식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급하게 차를 몰아갔지만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야 겨우 도착한 시골집의 안방에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과 하얀 꽃이 가득한 제단이 들어서 있었다. 익숙한 장소 안에 세워진 생경한 제단의 모습은 어린 나를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통곡하는 부모님 뒤에서 쭈뼛거리며 서있던 나는, 그들을 따라서 영정사진 앞에 절을 하려 몸을 숙이다가 이내 눈물이 펑하고 터뜨렸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죽음이 실감이 났던 것이다. 인생에 처음 맞닥뜨린 가족의 죽음, 중학생에게는 한없이 낯설고 슬픈 순간이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조문이 시작되었고, 상주들(특히 며느리들)에게는 가사노동의 서막이 열렸다.
우리 모두는 슬픔을 한편에 묻어두고 조문객 접대를 위한 음식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남자들은 읍내에 나가 식재료를 사서 나르기 바빴고 큰어머니와 엄마, 작은어머니들은 모두 새벽부터 하루 종일 조문객들에게 대접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집까지 먼 길을 와주신 고마운 조문객들에게 내어드릴 음식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밥부터 시작해서 국, 갖가지 반찬들, 다과 준비에 설거지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달려있었고, 한시도 주방 밖을 나갈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사촌들도 조문객 맞이에 예외 없이 동원되었다. 고등학생이던 언니들은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거들었고, 오빠들과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끊임없이 상을 차리고 상을 거두어야 했다. 조문객이 많은 시간에는 집안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근처 정자 아래에까지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날라야 했다.
그리고 난, 어린 나이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다는 게, 삭신이 쑤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끝없이 이어지던 좌식 상차림에 펴질 틈 없던 허리,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야만 했던 무릎에서는 두둑두둑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갈수록 현생에서 내 몸뚱이를 뚫고 오는 물리적 아픔에 눌렸다. 장례식을 치르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이었구나, 보내는 이도 떠나는 이도 모두 이렇게까지 아프고 힘든 것이 장례식이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갔던 나흘. 그리고 이제 정말 할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할 날이 찾아왔다.
큰아버지께서는 손주들을 모두 모으셨다. 발인 전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시려, 그리고 보내드리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관 안에 누워계시던 그의 얼굴은 너무나 낯설었다. 하얗게 분을 올린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채 곱게 다림질한 수의를 입고 계셨던 할아버지. 낯선 그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는 게 힘들었고 무서움이 울컥 올라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당시의 철딱서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어린 손녀의 눈물에 이별의 슬픔보다는 무서움과 낯섦이 가득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이 불쑥불쑥 솟아나곤 한다.
할아버지의 묘는 시골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선산에 자리하고 있다. 성인이 되고, 할머니께서도 더는 시골집에서 지내지 않게 된 이후로 발길이 뜸해졌지만, 할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어린 시절 내가 처음으로 상주에 이름을 올렸던 그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 나이 즈음이 되니 슬프게도 주변의 경사보다는 조사를 더 많이 받게 된다.
10대와 20대에는 누군가가 전하는 부고, 그 짧은 문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무언가가 내 몸을 관통하곤 했다. 인간의 평균 연령에 기대어 보았을 때 10대와 20대는 삶의 시작에 더 가까운 나이이다. 당연히 타인의 죽음에 대한 낯선 감정과 무서움이 있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들에게 내가 큰 위로가 되고 싶었던 욕심이 부담감으로 한 번에 몰려왔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마흔의 나는 어떤가.
분명 예기치 못한 이들의 죽음에는 여전한 충격, 슬픔, 삶과 죽음에 대한 황망함, 인생의 유한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만, 타인의 죽음을 받아 드는 내 모습은 20대의 나보다 아주 약간은 담담해져 보인다.
가족, 가까운 지인,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타인의 죽음을 여러 차례 마주해 오며 그 시절보다 조금은 더 무뎌진 마음으로 부고를 읽고 조문을 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을 온전히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게 자만이자 헛된 욕심임을 잘 알기에, 이제는 좀 더 차분하고 정제된 마음으로 부고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요즘이다.
2025.08.09.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