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17.

엄마의 병가(3)

by Ellen Yang


그러던 차에 동생이 돌아왔다.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우리 집에 파란 눈의 외국인, 부모님에겐 둘째 사위이자 나에게는 제부, 내 짝꿍에게는 동서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금발의 제부는 친정 근처에 있는 유명 어학원에 근무하는 것으로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는데, 외국인 강사에게 지원해 주는 숙소에서 둘이 지내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숙소가 (난 가보지 못했지만) 정말 가관이었다 한다. 친정에 임시로 거주를 하고 있던 동생네를 따라 입주 청소를 도와주러 같이 간 엄마는, 도저히 쓸 수 없게 곰팡이가 뒤덮인 매트리스, 샤워실 한 칸 크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화장실과 방과 거실 벽지 곳곳의 얼룩과 곰팡이, 기름때로 찌들다 못해 쪄든 주방을 휙 둘러보고는 "야, 됐다. 가자!"라고 충격으로 말을 잃은 그 둘을 쿨내 나게 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셋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과의 동거, 말도 안 통하는 장모와의 동거가 서로에게 어색하고 쉽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둘은 나름 잘 지냈고 엄마는 동생네 부부와 함께 두 번의 사계절을 보냈다.


1년 8개월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이 사이에 이들의 입국 목적이었던 동생의 영국비자가 승인이 났고, 제부의 취업비자도 만료일이 점차 가까워졌다. 이렇게 그들은 2년이 채 되지 않는 한국살이를 마치고 영국으로 떠났다.




다시 적막해진 집에 홀로 남게 된 엄마.

전보다 나이 들고 힘이 부쩍 소진된 엄마의 마음에 불안과 우울, 신경과민이 똬리를 틀었나 보다.

엄마는 결국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 번아웃이 온 것이었다.


돌아보면 엄마의 모든 생은 누군가를 돌보는 삶이었고, '남을 보살피는 것이 인생의 9할'이었던 엄마는, 본인을 보살핌에 있어서는 서툴기만 했다. 타인은 그 누구보다 능숙하게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그 정도를 몰랐던 거다. 자신에게 집중할수록 점차 본인의 몸이 내는 소리에 너무나 예민해졌다. 그리고 미세한 신체의 이상증세에도 불안증을 호소했다. (이모의 암투병을 바로 옆에서 24시간을 지켜보면서 더더욱 건강에 대한, 병에 대한 염려증과 집착이 생겨난 듯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한 사실은, 그 당시에 엄마로부터 오는 연락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는 거다. 우리의 대화에는 언제나 '엄마가 요즘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힘이 없는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는 말이 전부였다. 비관과 부정으로 꽉 채워진 대화.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기운이 빠졌다. 처음에는 매일매일 엄마에게 했던 안부전화는 점차 메시지로, 그 메시지조차 뜸해졌다.

간혹 오는,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는 전화가 오면 내가 어디에 있던지 엄마를 찾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일을 하다가도 뛰어가야 했고, 1시간 거리의 집에 있을 때도 엄마에게 바로 달려가야 했다. 몸이 아픈 엄마가 참다못해 딸에게 SOS를 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한다’는 머리와 ‘나도 지치고 힘들다’고 말하는 마음이 서로 삐걱대며 내 안에서는 이들의 불편한 싸움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면 그 와중에도 딸내미를 챙기려는 엄마의 모습에 날이 섰다.

“이거 좀 가져가. 너 주려고 사놨어. “ “조금이라도 먹어봐. 맛있으면 싸줄까?”라는 멘트에 “됐다고!”, “나 안 먹는다니까? “, ”이 걸 둘이 어떻게 다 먹어!”, “아프다면서 왜 자꾸 시장에서 무겁게 사들고 오는 거냐고! “라며 매번 짜증만 냈다. 그게 엄마가 본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무심한 딸은 눈곱만큼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프다면서 왜 자꾸 쓸데없이 힘을 쓰냐며 날만 새우기 급급했다니. 그거 좀 받아오고, 그거 좀 맛있게 먹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날 챙기면서 본인의 아픔을 잊으려고 했던 건데 말이다.




다시 돌아와 2025년 초,

엄마가 백화점에 주저앉았던 날.


다행히도 백화점에서 무사히 귀가한 엄마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울먹였다.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는데, 갑자기 사람들 많은 그 공간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답답함이 왔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분명했다. 이건 공황장애였던 거다.


그리고 엄마네로 오던 차 안에서 생각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어보았다.

아무래도 엄마의 병은 마음의 병 같다고. 신경정신과를 가보자고.

“검사받았던 모든 병원에서 위장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는데 음식을 거부하고 매일 배탈이 난 것 같은 증상이 계속되는 건 엄마가 그 증상 자체에 격하게 예민해졌기 때문인 것 같아, 신경안정제를 먹고 마음이 좀 편안해지면 지금보다 잠도 더 잘 자고 식욕도 돋아나고 소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 밑져야 본전이니 내일 해 뜨자마자 바로 근처 신경정신과를 한 번 가보자, 엄마.”


신경정신과에 가자는 말이 가뜩이나 예민한 엄마에게 부정적으로 들릴까 봐, 나와 짝꿍도 한 번씩은 다 가본 곳이라고, 요즘 사람들이 신경정신과를 얼마나 많이 찾는지도 곁들여가며 엄마를 설득했다.


그러던 중에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날, 아빠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을 비치지 않았던 아빠의 울먹임.


사실 그날 엄마의 전화에 아빠는 본인이 서울로 바로 올라오고 싶었는데 이사 중이어서 차마 올라올 수 없던 상황이라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거다. 아빠가 원래 살던 곳은 원룸이었는데 엄마가 곧 광주로 올 수도 있겠다는 촉이 발동했었는지 한두 달 전쯤 그보다 큰 집을 구했고 마침 그날이 이삿날이었다고 했다.

일단 이사를 마치고 다음날 첫차로 엄마한테 오겠다고 했다. 신경정신과도 본인이 같이 가겠다고.

그리고 병원에 들렀다가 바로 광주에 같이 내려갈 수 있게 짐을 챙기라는 말도 남겼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던 아빠의 흐느낌은 엄마에게 '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던 걸까. 아마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옆으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듯하다. 엄마는 그날 저녁, 무언가 편안함과 설렘이 살포시 스며있는 얼굴로 광주로 가지고 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히도 신경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은 효과가 있었다. 엄마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던 것이다.


광주에 내려가자마자 엄마는 바빠졌다. 그간 쓰던 오래된 살림살이를 모두 버려서 텅텅 비어있는 아빠의 새 보금자리를, 마치 신혼으로 돌아간 듯 하루하루 새로운 살림살이로 채워나가느라 바빴고 대식가인 아빠의 식사를 챙기느라 바빴다.

이렇게 엄마는 ‘아빠를 챙기기 시작하면서', 누군가가 옆에 있고, 챙김을 받아주는 이를 곁에 두자 다시 예전의 생기를 조금씩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식욕도 되찾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내 눈에 띈 둘 사이의 가장 큰 변화.

젊은 시절, 식구들 먹고 살리기에 급급해서 매일 숨 돌릴 틈도 없는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비수를 꽂는 말과 행동을 자주 쏘아대곤 했던 둘. 당연히 여행은 그저 사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둘은 매주 주말마다 지방 여기저기로 드라이브를 간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아빠와의 카톡창에 엄마 사진과 꽃 사진이 드라이브 인증숏으로 올라오곤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연애하듯 함께하는 둘 사이에서 과거엔 볼 수 없었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사랑이 보인다.




이렇게 아빠와 다시 함께함으로써 엄마의 병가는 끝이 났다.


아직은 한 달에 한 번씩은 병원 진료로 서울을 오가야 하지만 예전 같은 불안과 우울은 엄마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엄마와의 대화에는 둘한테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드디어 우리의 대화에 웃음꽃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 거다. 설렘과 즐거움, 행복이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내 마음 역시 행복이 충만해진다.




2025.08.18.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