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33.

역대급 추석, 여행이 필수?!

by Ellen Yang


마음이 초조하다.

이제 한 달 여 남짓 남은 추석연휴가 그 초조함의 이유이다.


사실 이번 추석연휴에는 그냥 집에서 또는 조용한 카페, 또는 서점에서 '고요한 쉼'을 실천하고 싶었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우리 집(주인님의 집)에서 바삭할 것만 같은 가을 산바람을 느끼며 책 읽고,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를 차분히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의 이 진중한 속마음을 얘기하면 백에 아홉은, "그래도..."가 대답이었다. 차마 밖으로 나오진 못하고 상대방의 목구멍에 걸려있는 '무려 일주일이 꽁으로 날아들어온 휴가인데 그냥 집에만 있겠다고?'라는 중얼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매번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이 반응에 '왜 내가 조용한 연휴를 보내고 싶다는 데 이렇게들 결사반대야?'로 소심하게 홱 토라졌다가도, 이제 점점 가스라이팅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자 달력 속을 주르륵 여느 낙엽보다 더 선명한 빨강으로 물들이고 있는 숫자들이 '이 아까운 시간을 뭐라도 했어야지, 하여간 게으르다니까!'라며 타박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예약을 했어야 했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지금이라도 어디라도 알아볼까?'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괜한 조바심이 들어 가까운 일본이라도 가보자는 불끈하는 의지로 항공권 예약사이트를 뒤적이다가, 아예 매진되거나 비수기에 비해 대여섯 배는 훌쩍 뛰어버린 항공권 가격을 보고는 이내 마음을 접기를 수 차례. 해외 말고 국내여행이라도 갈까 싶어서 휴대폰을 가지고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구를 훑어보다가는 이내 또 비싼 숙소값에 또다시 마음을 접고.


요 근래 거의 수 주일 동안 갑자기 '여행 가자! 가자 가자!!!'라며 부르짖는 제1 자아의 외침에 발동이 걸려서는 이곳저곳 여행지를 알아보다가 초극극극성수기 가격에 제1 자아가 살포시 내면 깊이 들어가면, '집에서 보내는 연휴가 뭐 어때서! 집이 제일 비싼데!!!'라며 원래의 계획으로 가자고 나를 토닥이며 다시금 앞으로 나서는 제2 자아, 두 녀석이 치열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다중이도 아니고 말이지.


이렇게 혼자 모노드라마 한 편을 찍어대는 내 옆에서 쿵짝을 맞추느라 바쁜 내 짝꿍. 여행 가자고 하면 장소 물색한다고 구글맵을 열심히 돌려보다가, 갑자기 아니야 안 갈래 하면 다시 앱을 닫고는 "그래, 이번에는 집에 있자. 어딜 가나 한국 사람에 어딜 가나 사람이 북적일 텐데 몇 백만 원씩 길에 뿌리느니 가까이에 맛집하고 카페 투어를 하는 건 어때?"라는 그. 나와 함께 다중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얼마 전 짝꿍이 영국 주재원으로 계시는 직장동료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영국은 피시 앤 칩스가 아니다, 비프웰링턴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던 게 발단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비프웰링턴?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건데!"라고 입맛을 다셨고, 이 이름이 생경하기만 한 짝꿍을 위해 열심히 이미지를 찾고 서울에 있는 맛집 링크를 툭, 툭, 툭 날렸다. (이미지 하나, 링크 하다마다 이런 걸 왜 자기한텐 알려주지 않았냐는 원망 섞인 음성지원 문자메시지에 돌아왔다는...)


그리고 우리 부부는 급 '비프웰링턴 원정대'를 결성하고야 만다.

야심 찬 원정대가 선택한 첫 원정지는 양재천 가에 자리한 유명 셰프님의 레스토랑이었다. 안타깝게도 주차장이 없는 곳이어서 근처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했고, 일요일 런치에 양재에 주차를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레스토랑 주변을 몇십 분을 돌고 돌다가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아무튼 자리 하나는 여유가 있었던 유료 주차장에 겨우겨우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또 갑자기!!! 살짝씩 비를 쏟을랑 말랑하는 하늘과 밀당까지 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약간 늦기는 했지만 마침 비어있던 창가석에 운 좋게 앉은 우리 둘.

창가로는 한적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푸릇한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었다. 살짝 흐리면서 빗방울이 흐드러진 날씨가 초록빛을 더욱 초록스럽게 물들이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애정하는 후무스가 들어간 전채요리부터 시원한 무와 비트조림이 압권이었던 냉파스타는 창밖 풍경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안주 같았다. 그리고 이어 나온 삼치 스테이크와 민어 셰비체. 얇게 저민 오렌지와 자몽 슬라이스 위에 쫀득하고 담백한 민어회. 나보다 먼저 달콤한 오렌지와 시금치 올리브유를 입은 민어회를 입에 넣은 짝꿍의 얼굴에 피어나는 놀라움이란. (내가 사랑하는 그만의 찐 리액션이다.)

상큼함이 도배된 입 안은 곧, 그보다는 묵직함이 있는 삼치로 채워졌다. 파사삭 소리를 내던, 영화 라따뚜이에 나오던 잘 구워진 바게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삼치의 빠삭한 껍질, 그리고 그 밑에 묵직하고 두툼하게 들어찬 하얀 속살은 지금까지 먹어본 삼치구이와는 비견될 수 없는 고급짐이 느껴졌다.

우리 접시가 빌 때마다 눈치 빠른 직원분들께서는 서빙이 끊기지 않게 다음 코스를 내어주셨고, 드디어 우리가 무려 미리 예약까지 한 '비프웰링턴'이 우리 테이블에 올라왔다.

보기만 해도 겹겹이 파삭함이 살아있는 패스츄리, 전체가 분홍빛으로 적당히 알맞게 익은 두터운 안심살, 패스츄리와 스테이크 사이를 채우고 있는 포르치니 버섯향을 담뿍 담은 뒥셀과 파테. 맛있는 애들만 다 모아놓은 애가 맛이 없을 수 없지.


한입에는 다 넣기도 어렵게 두터운 비프웰링턴을 큼직히 썰어 한 입 가득 채우니,

'이 맛에 돈 벌어야겠구나.'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맛있는 음식, 운치 있는 풍경.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이렇게나 마음이 차오르고 행복한데. 굳이 어딘가로 멀리 떠나지 않아도 행복을 가까이서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간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초조함과 조급함을 뻥 차버렸던 오후였다.




그래서 우리의 연휴 계획은?

갑자기 방문하고 훅 꽂혀버린 양재천. 그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맛집과 카페, 갤러리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있던 레스토랑 창문과 양재천 사이를 오고 가던 자전거. 그 자전거에 꽂혔다.

'우리도 양재천에 자전거를 타고 가자! 연휴에 여기 맛집과 카페를 뽀개는거야!!'


짝꿍은 지금 바쁘다. 비행기값으로 자전거를 사야 하나 하고 흘렸던 내 말을 진심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커플 자전거 물색 중이다. 조만간 우리 집에 자전거 식구 둘이 들어오겠다. 제법 큰돈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자전거와 함께 집 근처 곳곳을 쏘다니며 이 가을의 정취를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는 둘만의 자전거 여행이 이어질 거란 생각에 마음 한편이 선덕거리고 있다.




2025.09.03.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