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야행
내가 지금 사는 동네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 먹거리 '야행'이다.
주택에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찹쌀~떠억~"하면 겨울이 왔음을 눈치챘고, 아침의 고요함을 깨는 "과일이~ 왔어요~."라는 시끌시끌 우렁찬 과일 트럭의 확성기 소리, 그리고 트럭에 한가득 실려오는 과일들로 그 계절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짝꿍은 옆에서 꼭 "어유~ 옛날 사람!"이라고 장난기 어린 멘트를 날리고는 나에게 등짝스매싱을 당하곤 하지만, 이게 내 어린 시절을 소환해 주는 추억의 소리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혼하고 신혼을 아파트에 시작하게 되면서 이런 향수가 가득 담긴 바깥소리는 내 삶과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어릴 적 낭만을 떠올리는 즐거운 밤 여정 하나가 생겼다.
우연히 짝꿍의 지인을 통해 어릴 적 자주 보았던 동네 과일 트럭과 같은 존재를 알게 된 거다.
하나 차이점이라면 어릴 적 과일장수 아저씨와는 다른 체계적인 구매 절차가 필요했다.
우선 매일 아침 사장님께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올려주시는 그날의 품목(제철과일이나 채소, 계란이 주로 올라온다.)을 보고, 공지글에 댓글로 원하는 수량을 남긴다. 수량에 맞는 금액을 입금하고 그날 밤에 트럭이 왔을 때 입금증을 보여드리면 주문한 상품을 받아올 수 있고 했다.
사장님이 바삐 돌아다니시며 그날의 가장 상태 좋고 맛 좋은 과일이나 채소를 찾아 공지를 띄우시기 때문에 상품들의 퀄리티가 남다르다는 후기까지 듣고 나자 귀가 세차게 펄렁였던 나는 대번에 그 오픈채팅방에 들어가서 그날부터 바로 이 즐거운 식자재 쇼핑대열에 합류했다.
첫 쇼핑은 '한라봉'이었다. 혼자 가기엔 뭔가 쑥스러웠던 난, 기어코 짝꿍을 끌어들였다.
"대체 트럭이 어디에 선다는 거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 걸까?"
첫 쇼핑의 들뜨고 설레는 마음, 궁금증이 한데 섞여 서로에게 연신 물음표를 날리며 발길을 재촉했던 우리. 하지만 곧 깨달았다. 굳이 이걸로 열띤 토론을 벌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구루마나 큰 에코백을 손에 든 채로 동서남북에서 삼삼오오 모여드는 동네 주민분들의 모습에 "저분들도 파티원이 신가 봐!"라고 속삭이며 점점 길어지는 꼬리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
난 이 동네 이사 온 지 5년이 다 되어가도록 매일 밤 9시, 아파트 언저리 골목 어귀에서 이런 자그마하고 낭만적인 장이 서는 줄 왜 몰랐을까. 이미 오래전부터 먹거리 쇼핑메이트로 친숙하신 분들 사이에 오고 가는 반가운 인사, 무얼무얼 주문했는지 공유하고 전에 사 먹었던 과일의 품평까지... 낯섦을 이기려 일부러 끼고 갔던 이어폰의 음량을 살포시 내리고는 그들의 수다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음엔 OO를 사야겠군!' 하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2025년 늦봄부터 시작된, 야밤의 이색체험.
꿀 같이 달콤한 과일의 맛과 내음, 싱그러운 채소와 그날 아침 갓 낳은 달걀을 장바구니에 담아 올 때의 풍족함, 야밤에 집에 널브러져 있지 않고 먹거리를 찾아 부산 떠는 나 녀석에 대한 기특함과 함께, 이 역시 미래의 나에게 특별한 추억거리가 될 거라는 뿌듯함까지 몰려오는 기분 좋은 밤 시간. 정적이던 나와 짝꿍의 평일 밤은 야행이 주는 활기에 중독되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만 중독되었던 것 같지만...?!)
그날은 딱 그 시기에만 나온다는 대극천이라는, 이름부터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복숭아가 올라왔다.
밤공기가 꽤나 더워진 초여름 밤이었지만 이미 이 다디단 복숭아라는 입소문이 더해진 터라 긴 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짝꿍이 다른 약속이 있었던 바람에 혼자 2킬로가 너끈히 넘는 복숭아를 가지고 와야 했던 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복숭아 한 박스를 양손에 가득 안고 겨우겨우 우리 동 앞 엘리베이터에 도달했다.
꼭 이럴 때에만 저 멀리 맨 꼭대기층을 찍고 돌아오는 얄미운 엘리베이터. 에어컨도 없는 로비에서 이제는 그냥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며 엘리베이터가 1층에 오길 기다리는데 누가 봐도 야행의 파티원이었다. 나와 같은 복숭아 박스를 카트에 올려 끌고 오시는 연세가 좀 있으신 아주머니와 짧은 눈빛교환이 있었던 찰나, 다시금 우리 동 앞에 출입문이 열리며 내 또래의 여자분이 들어왔다. 이분 역시 손에 복숭아가 들려있었다.
분명 피리 부는 과일 트럭 뒤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줄을 서있었을 게 분명한 셋. 속으로 분명 '어, 너도? 야, 나도!'를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에어컨 꺼진 열기 가득한 엘리베이터(밤 9시면 꺼지는 우리 아파트 에어컨...) 안에 세 여자와 복숭아 세 박스. 흔치 않은 이 상황에 입술로 꾹 누른 웃음을 티 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이는데, 내 또래 여자분이 우리 셋의 침묵을 깼다.
"하, 참 수고스러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순간 모두의 입에서 "풉"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더위에, 이 무거운 걸 들고 오는 것이 수고인 것에 대한 공감, 그런데도 마치 중독처럼 이 야행을 멈출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격한 공감이 묻어있었다. 어색함 가득했던 처음 보는 이웃들에게 무언가 끈끈한 동료애가 느껴졌던,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밤이었다.
복숭아 이후로 장마와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터에 한동안은 선뜻 발길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곧 가을 녘의 선선함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면 다시금 이 야행의 행렬에 동참해야지.
오늘도 우리 동네 마켓 공지글에 무엇이 올라왔나 기웃거리게 되는 아침이다.
2025.09.04.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