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지 않아요
몇 개월 전,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 예약을 하려고 네OO 예약 사이트를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내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조용히 시술받기」
이게 웬 신박한 옵션일까. 그 아래에는 '헤어에 대한 상담 제외한 불필요한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기 희망하시는 고객님들은 체크 부탁드립니다.'라는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이 문구를 보는데, 왜 이런 옵션이 이제야 세상에 나오게 된 건가, 미용실에서 이 옵션을 생각해 내신 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간 네일숍이나 미용실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불필요한 사적 대화와 신상털이로 폭격당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재미로 몇 번 해봤던 MBTI 검사에서 단 한 번도 'E'성향이 가까이 가지 못한, 극 'I'가 바로 나다.
몇 번의 데면데면함을 이겨내고 친해진 이들에게는 꽤나 장난꾸러기에 수다쟁이로 통하지만 하지만 누군가와의 첫 만남은 내 마음을 긴장감으로 한껏 부풀려놓곤 한다.
이러다 보니 미용실도 그렇고 네일숍도 그렇고, 일대일 대면이 필요한 상황에는 마음 한 편에 언제나 불편함이 동반한다. 그래도 누군가로부터 정성스러운 케어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낯섦과 불편함을 앞서는 덕분에 미용실도 가고 네일아트도 하러 다니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새로운 디자이너분들과의 낯선 만남을 피하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큰 이변이 없는 한, 한 우물만을 정성껏 파곤 한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지도 어언 5년.
그동안의 생활반경과는 아예 뚝 떨어진, 내 평생 이곳에 터전을 잡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동네였다. 이는 곧 그간 나를 케어해 주던 숍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새로 정착한 이곳에서 다시금 유목민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또다시 낯선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순간순간을 맞서 싸워(?) 이겨야 했다.
2년 전쯤, 오래간만에 청첩장을 받아 든 나.
(이제 내 나이쯤 되면 청첩장보다는 부고를 훨씬 많이 받아 든다.)
오랜만에 가족 경사를 맞이했던 터라 괜히 마음이 동해서는 네일아트를 받고 싶어졌다. 집 근처의 네일숍을 이곳저곳 물색하다가 겨우 당일 예약이 가능한 곳을 찾아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간의 긴장감을 친구처럼 데리고서는 처음 가보는 낯선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피스텔의 10층, 자그마하게 네일숍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달려있던 닫힌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입구를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일반적인 네일숍과는 다르게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 마치 생판 모르는 옆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것 같이 심장이 제멋대로 나대는 긴장감이 더해졌다.
'철컥'하며 열리는 문틈 사이로 밝디 밝은 원장님의 웃는 얼굴과 함께 "안녕하세요! 방금 전화 주신 분 맞죠?"라는 맑고 높은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성격이 매우 쾌활하고 밝은 분 같았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1인숍이었던 이곳은 하얗고 깔끔한 실내에 최소한의 작업용품들과 가구들로만 꾸며진 네일숍은 10평도 안 될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꽤나 공간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말소리에 울림이 생길 정도였다.
나는 누가 봐도 네일아트 손님용인 의자에 착석했다.
그리고 원장님은 누가 봐도 원장님 용인 의자에 앉으셨고, 곧 나의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셨다.
"여긴 어떻게 아시고 오셨어요?"
"네? 아... 근처에 네일숍을 알아보다가..."
"은근히 찾아오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주차하셨어요? 아! 걸어오셨구나~. 사실 주차가 아직은 무료이긴 한데 곧 주차비를 내셔야 할 수도 있대요. 그나저나 저도 이 근처 사는데, 이 동네에 다른 네일숍도 가보셨어요? 전 시간 날 때 한 번씩 가본답니다~. 네일숍 운영하는 거 티 안 나게 하려고 해도 얘기하다 보면 확실히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티가 나나 봐요, 하하하."
그 흔한 BGM도 없이 적막이 흐르던 숍에는 어느 순간부터 간단한 호구조사를 시작으로 밑도 끝도 없는 TMI가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음악을 틀지 않으셨던 건, 수다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던 45분. 이 사이에 난 그분에 대한 모든 걸 다 알게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시술 막판에는 심리테스트까지 이어졌고, 나 역시 그분의 장단에 맞춰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손님이라고는 혼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네일숍의 철문을 뚫고 그 누구도 이 어색함을 깨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극도의 피로감이 쌓여갔다. 내 귀는 먹먹해지고, 상사의 유머에나 어울릴 법한 굳은 미소가 얼굴 위로 떠오를 즈음 시술은 마무리되었다.
결혼식장에 가기도 전에 기가 훅 빨려버리는 체험을 하고 나니 그곳에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난 재빠르게 다른 네일숍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젤네일을 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뗄 수 없어서 어쨌든 어디든 다른 숍을 찾아봤어야 했다.)
이번에는 1층에 위치한,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숍이었고 디자이너 선생님도 두 분이 계셨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던 이곳에서 새로 만난 디자이너샘은 성격도 배경음악만큼이나 조용조용했다. 우리 사이에는 굳이 무언가 꼭 이야기가 오고 가야 할 의무나 압박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네일 관리를 정말 꼼꼼하게 잘해주셨고 단 한 번이었지만 강렬했던 시행착오 끝에 내 손이 정착할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요즘은 이렇게 '조용히 시술받기'를 옵션으로 두는 곳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 한다.
예전에는 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단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예민한 사람, 까칠한 사람, 차가운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개인의 성향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주려는 분위기가 다져지고 있으니 이런 분위기라면 혹시나 또다시 낯선 환경 속의 얼음 같은 데면데면함에 마주했을 때 굳이 이를 깨부수려 각고의 노력을 들이지는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극 'I'의 세상살이가 전보다는 편해지겠다는 마음이 들어 안도하게 되는 요즘이다.
2025.09.02.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