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47.

애증의 지하철(3)

by Ellen Yang


출퇴근길에 인생의 고난과 역경의 쓴맛만 준다면 지하철이 내 선택지에 우선순위에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

세상사는 게 이런 거지 싶은 즐겁고 웃음 나는 순간들이 더해져서 쓴맛을 살포시 덮어주곤 한다.


지난 주말, 짝꿍과 함께 맛집탐방을 위해 지하철을 탔다. 주말에는 대부분 우리 집 붕붕이(우리 부부 자동차의 애칭이다.)를 가지고 움직일 때가 많은 데 가려던 곳이 강남이라 토요일 오후 강남에 도로교통상황을 고려해서 대중교통을 타기로 하고 나선 길이었다.


주말도 역시나 지하철은 제 시간대로 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 시간표가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두 대가 연달아 전역과 전전역에 서있는데, 역사 내 상황을 보아하니 한동안 열차가 들어오지 않았던 게 뻔했고 바로 들어올 열차에는 당연히 사람이 빼곡하게 차있을 것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데 괜스레 시작부터 기분이 구겨지고 싶진 않았던 우리는, 차라리 뒤차를 타고 환승역에서 좀 더 재빠르게 움직여보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조금의 기다림이 선사한 여유로운 열차 안에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이수역에 도착한 우리. 계획대로 긴 환승길을 축지법을 써서 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장바구니 카트를 가지고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고 계시는 게 보였다. 순간 '들어드려야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던 찰나 내 앞에 급한 발걸음으로 지나가시던, 그리고 나보다 행동이 더 빨랐던 어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말도 없이) 아주머니의 카트를 그녀의 손에서 툭 낚아채고는 계단 아래까지 가셔서 쿨하게 손인사를 남기신 채 갈 길을 가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아이고, 내 가방!'하고 그 할아버지가 가방을 채가는 줄 아셨던 모양인데, 계단 아래까지 내려다 주시던 그 뒷모습에 연신 "아유, 고마워요~!"를 외치셨다. 이미 눈에서 멀어진 할아버지께선 당연히 못 들으셨겠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쿨하고 멋지던지 우리 둘 다 "와, 할아버지 정말 멋지신데?"라는 감탄사를 동시에 내뱉었다. 나도 저런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추위가 극성이던 날의 지난겨울의 출근길.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하철이 급정거를 한다한들 절대 넘어질 수 없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있던 날이었다. 정적만이 감돌던 지하철 칸 안에서 갑작스러운 소란함이 일렁였다. 내가 서있던 곳에서 의자 한 줄 거리에 계시던 여자분이 픽하고 쓰러지신 것이다. 밖은 춥고 안은 히터 열기로 갑갑해질 대로 갑갑해진 열차 안에서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셨나 보다. (나도 종종 너무 갑갑하고 속이 울렁여서 쓰러질 것 같을 때가 있곤 했으니까.)


그런데 난 이 날 급작스런 상황에 대응하셨던 동승자분들의, 이런 상황이 마치 한두 번은 아니었던 건가 싶을 정도의 프로페셔널했던 모습에 자못 반해버렸다. 갑자기 그 좁던 칸에 공간이 생기고 각자 맡은 소임이 있었던 것처럼 어떤 분은 지하철 고객센터로 긴급전화를 넣었고, 어떤 분은 생겨난 공간에 그분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역에서는 응급상황을 전달받은 역사 내 직원분들이 발 빠르게 출동하셔서 쓰러지신 분을 지하철 바깥으로 옮기고 응급처치를 하셨다. 이 일련의 절차가 딱 지하철 1개 역을 가는 도중에 시작됐고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발 빠른 대처 덕분이었는지 여성분께서는 다행히도 바로 정신을 차리셨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긴급상황에 대처했던 그날만큼은 동승자 모두에게 친밀감과 자랑스러움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편한 신체접촉이 마냥 짜증 나고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 마음의 긍정과 부정은 한 끗 차이임을 또다시 깨달은 아침이었다.)




얼마 전에는 퇴근길에, 정말 오래간만에 지하철에 '앉아'왔다. (잭팟만큼이나 드문 경우다!)

자리에 앉고 나서 다음 정거장에 타신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께서 내 바로 옆자리에 앉으셨다. 아주머니께서는 한동안 휴대폰을 만지작만지작 하시다가는 이내 찾아온 졸리움을 참지 못하시고 꾸벅 잠에 드셨나 보다. 전동차가 움직일 때마다 내 쪽으로 기우뚱 꾸벅거리셨던 거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와 닿을락 말락 한 가까운 거리에 놓인다는 건 나같이 낯을 많이 가리는 이에게 편치 않고 다소 난감한 상황임이 분명했고, 평소라면 응당 몸을 반대쪽으로 움찔거렸을 거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이끌고 터덜터덜 기대 없이 탄 퇴근길 지하철에서, 간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사실에 마음에 채워진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머니께서 내 쪽으로 기울여 오실 때마다 살짝살짝 코끝을 간질이는 비누향에 긴장감과 낯섦의 빗장을 활짝 풀어주었던 것 같다. 슬쩍 어깨까지 내드렸으니 말이다.


내 어깨에 본인의 머리가 닿아 깜짝 놀라 깨어나신 아주머니께서 미안한 듯 내 얼굴을 바라보셨지만, 살짝이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괜한 뿌듯함과 함께 마음 안에 훈풍이 솔솔 불어왔다.




매일매일 몸을 싣는 지하철 안에서 배우고 느낀 인생의 희로애락의 순간들.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오늘 지하철 칸 안에서 스쳐 지나간 분들 모두 나름의 인연이었음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같은 출퇴근길의 전쟁통을 지나 오늘도 각자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할 그분들의 모습이 그려져 왠지 모를 동료애도 느껴지고 말이지.


이렇게 오늘 하루도 지하철과 함께, 그 안의 많은 이들과 함께 나아가본다.




2025.09.17.

Ellen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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