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49.

두 번의 하와이 여행(1)

by Ellen Yang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생글생글했던 신혼 초에 '봄과 가을의 부부'로 지냈어야 했다.

무언가 낭만적인 느낌이 가득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짝꿍의 해외 파견으로 2년이라는 시간을 봄과 가을에만 만날 수 있는 부부로 살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도 언젠간 밀린 일기에 꼭 남겨야지.)


교육과 실습차 나갔던 파견이라 가족 동반은 절대 불가였고, 봄과 가을 언저리에 건강검진, 정산, 업무보고 등을 위해 한국에 잠시 귀국하는 2주 안 되는 짧은 기간이 우리 부부가 1년 중 같은 집에 지낼 수 있는 전부였다. 만약 회사에 N박의 연수이라도 끼어들면 일정의 일부는 회사에 빼앗기고 말았고, 나 역시 직장에 몸이 매여있는 처지여서 말이 2주이지 서로 얼굴 대고 마주 앉을 시간은 1주일도 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연중 채 한 달이 안 되는, 짝꿍과 재회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 싫었던 건 너무나 당연했지만 대한민국 직장인의 처지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계획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파견 2년 차에 접어들었던 초봄, 짝꿍의 두 번째 귀국일정이 나왔다. 그리고 난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귀국일정이 처음보다 제법 길었던 터라 이 정도면 어디로든 여행 계획을 짜기에 딱 좋은 타이밍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특히 비행기 타는 여행을 좋아하는)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그간 억눌렸던 둘만의 여행에 대한 욕구가 터져 나왔고 그 기세를 몰아서 우리는 인생 첫 하와이 여행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여행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얼마나 즐겁지 않았으면 무얼 했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어디에 묵었는지조차도 기억에서도 희미할 정도.)


다만 한 가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있다. 일단 시작부터 삐걱였다는 거.




우린 미국 입국에 비자가 필요 없는 줄 알았다.

신혼여행으로 라스베이거스를 갔던 우리였기에 미국 여행이 처음도 아니었건만, 신혼여행은 여행사를 통해서 준비를 해주어서 어떤 부분까지 세세히 예약을 해주었는지 제대로 체크를 해보진 않았었다. 당연히 알아서 ESTA를 발급해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하와이 입국에 ESTA가 필요하다는 건 출발 당일 체크인을 해주던 항공사 직원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나마 그날 우리가 공항에 일찍 도착했던 것이 천운이었고, 친절하고 또 친절한 UA항공 지상직 직원분이 도움의 손길을 세차게 뻗어주신 덕분에 비행기 탑승시간을 코앞에 두고는 ESTA 승인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식은땀이 절로 나는 경험이었다. 그 승인을 기다리던 1분 1초가 어찌나 길던지. 내 생에 그렇게 쫄렸던(?) 적이 있었나 싶다.


미국 전자여행허가의 승인이 났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천사 같던 직원분께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고맙다는 말씀을 연신 외치고는 면세점이고 뭐고 "일단 뛰어!"를 외치며 (하필이면 멀기도 멀었던) 탑승구로 돌진했다. 다행히 겨우겨우 떠나기 직전의 비행기에 안착했지만 이때부터 우리의 저질 체력은 이미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항공편은 직항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여행비를 아끼려고 괌을 경유하는 항공편을 예약했던거다.

처음 탄 비행기는 우리를 괌까지 데려다 줄 예정이었고, 괌에서 짧은 대기시간 후에 연결 항공을 타면 우리의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저녁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경유하는 사잇시간이 길지 않아서 택했던 여정이었건만, 우리는 자연재해를 만나고 말았다.


몇 시간의 비행 후 괌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 창밖의 모습을 보고는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몇년만에 태풍이 훑고 있던 중이었던 괌.(갑자기? 지금? 왜?) 거센 바람에 빗물은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한 채 지면과 수평이 되어 공중부양 중이었고, 공항에 심어져있던 나무들도 간신히 그들의 뿌리를 바닥에 박고 있을 뿐 잎사귀와 얇은 줄기들은 강풍에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기장님은 공항 도착 몇 분 전부터 괌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태풍으로 인하여 공항이 혼잡하다고, 항공편들이 모두 결항되었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리셨지만 '뭐 심해봤자 얼마나 심하겠어.'라는 안일한 전제 하에 금방 개이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연결편에 큰 문제는 없겠지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광경은 흡사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릴수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괌에 묶였다.


괌 공항 안은 출퇴근길의 대중교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앉을 자리 하나 없이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괌으로 출산여행을 오셨다가 공항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계시는 가족들도 다수였다. 우리는 불행 중 다행으로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은 연결편이 뜰 때까지 반강제로 라운지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눈은 계속 항공편 운항표에 정지상태였지만 쳐다본다고 CANCEL이라는 글씨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안그래도 늦은 시간에 하와이에 도착한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뭐 새벽에나 호텔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인 상황. 혹시나 예약한 숙소가 노쇼로 취소될까봐 안되는 영어로 호텔에 비행기 문제로 많이 늦어질 거 같다고, 취소하지는 말아달라는 메시지까지 전하고는 태풍이 가라앉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애초에 짧았던 일정, 거기에 경유로 더 빠듯해진 일정. 입국허가문제에 심지어 악천후까지 겹친 첫 하와이 여행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한국에 들어온 짝꿍에게는 (아무리 그 당시의 짝꿍이 젊디 젊은 젊은이였다고 해도) 바로 이어서 하와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을 거다. 간신히 시차 적응을 할 즈음에 또다시 하와이행, 그리곤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며칠 후 다시 파견지로 가야 하는 일정이라니. (정말 극기훈련이 따로 없다.)


그리고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남들이 좋다, 멋지다, 예쁘다 하는 곳에서의 여행도 여행자의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즐거움이란 없다는 걸 말이다.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로 초행의 하와이 도로를 (운전 못하는 날 대신해서) 렌터카로 움직이기까지 해야 했던 짝꿍의 얼굴엔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웃음기가 사라져 갔고 어딜 가나 하품하고 졸기를 반복했다. 짝꿍이라고 오래간만에 온 여행에서 졸기만 하고 싶진 않을 텐데 얼마나 피곤하면 저럴까 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애써 달래 보았지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내 마음엔 서운함과 서러움이 가득 찼다. 결국은 화산에서 용암이 폭발하듯 내 눈에서 눈물이 폭발하고야 말았고.


늦은 밤, 해변 벤치에 앉아서 밤바다를 쳐다보다가 그간의 서러움이 터져 나와 꺽꺽대며 울었던 기억.

그런 내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달래려 애쓰던 짝꿍.


분명 멋진 하와이의 경관을 보며 감탄했을 거고 맛있고 유명한 음식들로 배도 든든히 채웠을 텐데 지금 와서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건 결국 고생했던 우리의 모습인 거다.

이렇게 99% 다크초콜릿 맛이 나는 씁쓸했던 첫 하와이 여행은 끝이 났다.




2025.09.19.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