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51.

두 번의 하와이 여행(3)

by Ellen Yang


이쯤 되니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누가 뒤통수를 사정없이 휘갈겨서 머릿속에 모든 게 빠져나온 듯한 멍함만이 존재했다.


셔틀버스 기사님은 자기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미국인 특유의) 어깨 으쓱 제스처를 하고는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나려 했다. 이런 그를 붙잡고, 그나마 이성의 끈이 남아있었던 짝꿍은 기사에게 그러면 전에 내린 일본인 부부가 어떤 호텔에서 내렸는지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혹시나 그 부부가 잘못 가지고 내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자 기사는 또 입을 삐죽 대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에 꾸깃꾸깃 접혀있던 종이를 꺼내어 직전에 정차한 호텔 이름을 적어주었고, 자기가 할 일은 다했다는 듯, (예의상이었겠지만) 행운을 빈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일단 호텔 체크인 카운터에 남아있는 캐리어 하나를 맡기고 종이에 적힌 호텔에 가보자는 짝꿍.

넋이라도 있고 없고 상태의 나를 끌고는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어서 20분 남짓의 거리에 있었던 그 호텔에는 주말을 맞이해 하와이에 놀러 온 수많은 관광객의 캐리어들이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본인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혹시나 로비에 놓여있는 수많은 캐리어 중에 내 캐리어가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열심히 살펴봤지만 역시나. 내 캐리어는 없었다.




빈손으로 호텔에 다시 돌아온 우리.

그 사이에 짝꿍은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혹시 분실물에 대해 여행자보험을 청구하려면 어떤 게 필요한지를 물어보았나 보다. 이런 분야에 파삭한 (알고 지낸다는 사실 자체로 든든하게 느껴졌던) 지인은, 한국에서 보험료 청구를 하려면 현지 경찰에게 발급받은 '폴리스리포트'를 꼭 챙겨 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호텔 카운터로 달려갔다. 그리곤 작금의 상황을, 서툰 영어에 그렁그렁 눈에 맺힌 눈물을 보태서 설명하고는 혹시 하와이 경찰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오자마자 넋이 나간 얼굴로 온사방을 헤매고 다니는 우리 둘을 안쓰럽게 봐주신 호텔 직원 덕분에 하와이 경찰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경찰분께 캐리어를 공항에서 도난당한 것 같다는 정황을 손짓 발짓에 눈물을 섞어가여 설명한 결과물로 엽서 크기의 폴리스리포트를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손글씨로 적힌 엽서 같은 리포트로는 공식적인 효력은 없었고, 우리나라에 LOST112라는 유실물 종합안내 사이트에서 신고한 내역으로 서류를 다시 준비해야 했다...)


이쯤 되니 이제 스을 가출했던 내 안의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을 수 없었던 짝꿍과 난, 혹시나 어디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또는 (어쩌면, 제발...) LOST & FOUND에서 보관중일수도 있는 캐리어를 찾으러 다시 공항에 가보기로 했다.


점점 뉘엿거리는 해를 보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출발할 수 있었던 무려 '호텔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밖에서부터 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 셔틀을 탔던 정거장 근처, 그 외에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내 캐리어로 추정될만한 그 어떤 물체도 없었다. 공항 직원에게 물어물어 찾은, 주차장 깊숙하게 있던 분실물센터는 주말이라 문을 굳게 닫아둔 상태였고 말이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우리에게 돌아올 기미가 없다는 건, 이젠 아무리 아프고 힘들더라도 캐리어를 놓아줄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에 닿았다. (한낱... 은 아니지만...) 캐리어 때문에 소중한 여행 일정 모두를 날려버릴 순 없으니까.




야속하리만치 맑고 화청 하던 하와이의 하늘.

따스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햇살은 그날따라 유독 따가웠다. 더운 날씨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여행의 낭만이란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하면, 내 캐리어에는 진짜 내 옷가지와 신발, 모자와 (엄마에게 선물로 받았던 제법 비쌌던) 고데기, 그리고 홍삼 제품(이게 제일 값이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것들이었고 세안용품이나 비상식량 같이 무게가 좀 있는 짐들은 짝꿍의 캐리어에 들어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갑작스럽게 내 앞에 찾아온 무소유의 상황에, 가진 것이라곤 여권과 지갑(그나마 이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뿐이었고 장시간 비행에 찌든 몸을 씻긴다 해도 바꿔 입을 옷 하나도 변변치 않았던 나는, 이미 녹초가 된 몸을 억지로 호텔 밖으로 끌어내어 속옷과 티셔츠, 바지 같은 필수품을 사러 근처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2025.09.21.

Ellen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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