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하와이 여행(4)
24시간이 아니라 240시간은 족히 될 것만 같았던 빡빡하고 알찼던(?) 하루.
지금 이 상황의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라고는,
1. 이제 캐리어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2. 난 이렇게 하와이의 누군가에게 (홍삼까지 기부한) 기부천사가 되었음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며
3. 더 이상의 고난의 해프닝은 사양한다는 마음으로 필요한 물품을 현지 수급하여 이 여행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텅텅 비어버렸다고 하기도 무색한, 아예 사라져 버린 내 소지품들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나가기 위해 호텔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마트와 쇼핑몰로 걸음을 옮겼다.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오늘 할 일을 다한 듯 서서히 저물어가고, 길 구석구석에 살며시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하와이에 와서 여행지이라고 내세울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향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쇼핑성지로 불리는 알라모 쇼핑몰로.
제대로 식사 한 끼 먹지 못해서 뱃가죽이 등에 닿은 것만 같았고 몸은 천근을 매달아 놓은 듯 무거웠지만 어쨌든 밥도 먹고 옷가지도 좀 장만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한발 한발 힘주어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딘가에서 너무 친근하게 "헤이, 브로!"를 외치며 다가오는 두어 명의 흑인 패거리가 길 가던 우리를 붙잡았다.
'아... 이제 제발 그만...'
오늘 하루 이미 넘치게 알찼다고... 이렇게 알찬 하루도 없었으니 더는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고 호텔에서 쇼핑몰, 고작 30분 정도 거리 길에서 하필 또 동네 깡패무리를 만나는 건 또 뭐람.
"너희 한국인이야? 나 GD 좋아하는데, 너네 GD 좋아하니, 브로?"
"우리가 CD 싸게 줄게.(야, 요즘 CD 듣는 사람이 어딨냐!!) 20 bucks에 싸게 판다니까."
"비싸? 그럼 10 bucks에 해줄게."
하... 진짜 우리한테 왜 이러냐고...
여차하면 욱하고 터질 것만 같던 짝꿍의 얼굴이 내 시야를 메웠다. 순간, 혹시나 우리가 저항했다가 이 깡패들이 흉기라도 내두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10달러에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백배 나을 것 같았다. 얼른 지갑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어 그들 손에 쥐어주고 진짜 GD의 음반인지 아닌지도 모를 CD를 받아 들고는 짝꿍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걸어서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정말 다행히도, 마침 10달러 지폐 1장만 지갑 안을 지키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지갑 안에 돈이 더 들어있는 걸 봤다면 10달러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알라모 쇼핑몰. 허기짐에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던 우리 둘은 대충 눈에 띄는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오늘 저녁에 갈아입을 옷가지를 쇼핑하러 나섰다.
귀찮음이 절정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의 나라면 발도 들이지 않았을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에서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속옷 한 세트와 반팔 티셔츠 두 장을 사들고 나왔다. 일단 급한 불은 이렇게 껐고.
다음날 아웃렛에 가서 본격적인 쇼핑을 하자는 다짐과 함께 몰을 빠져나오며 호텔로 돌아갈 때는 두 마리의 나방처럼 지름길은 아니었지만 가로등 밝은 길로만 따라갔음은 물론이다.
여행의 이틀차. 오전 9시로 예약해 둔 렌터카를 픽업하고는 바로 와이켈레 아웃렛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제만큼 맑고 쾌청한 하늘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어제의 불행을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이 경치 좋고 맑은 하와이의 풍경이 필터 없이 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눈에 선연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행이 잊히자 여행의 설렘이 마음에 되돌아와 자리를 잡았던 거다.
나쁜 일이 있었으면 좋은 일이 있는 법.
아웃렛에서 내 인생 통틀어 제일 신나는, 또 이런 무소유의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다시없을 과감한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옷이 없어서 반강제 허즈번드룩으로 여행 이틀차 여행을 시작했던 나였지만 반나절의 아웃렛 쇼핑이 끝나자 내 캐리어가 환생했다 해도 믿을 만큼 '다(시) 가진 자'가 되었다. 일단 28인치짜리 캐리어를 시작으로, 여행 내내 입을 옷가지와 신발, 마음에 드는 소품들이 보일 때마다 계산대에서 카드와 현금을 거침없이 내밀며 쿨내 나는 쇼핑을 한 결과였던 거다.
소심하고 낙관적이라기보단 비관적 성향이 강한, 그리고 세상살이에 걱정과 불안이 많은 내가 이런 상황에서 "나 그냥 집에 갈래."가 아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다행이네!"를 외칠 수 있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후줄근한 차림에 땀냄새가 푹 절어있는 옷을 입고 탔던 인생 첫 리무진, 그 안에서 "그래도 우리가 이 덕에 호텔 리무진을 다 타보네?"라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던 순간. "자, 이제 캐리어부터 쇼핑을 시작해 볼까?", "돈 쓰는 재미가 쏠쏠하구먼!"라는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야무지고 알차게 했던 아웃렛 쇼핑.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의 쓰나미가 한차례 훑고 지나가니 그 이후에 찾아온 여행의 모든 순간들이 곱절로 즐거웠고, 나뭇잎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함박웃음이 절로 나올만치 우리 부부에게 큼직한 행복을 양껏 안겨주었다. 지금 같은 불행은 없을 거야라며 풀썩 주저 않기보다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태도로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나니 그 이후에 나에게 찾아온 여행의 순간순간들이 좀 더 꿀맛같이 다가왔달까.
어쩌면 그래서, 그 어떤 여행보다 인생의 희로애락이란 이런 것임을 깊이 각인해 준 2017년의 하와이 여행이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25.09.22.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