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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대하는 두 다른 유형에 대한이야기

소소생활 소소생각 [02]

by 에디

저의 작은 생활 속에

작은 영화 모임을 하나 하고 있어요.

직장인들끼리 오손도손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 서로에 대한 가치관 등을 나눈답니다.


아래는 영화를 보며 나온 얘기들 중 삶을 대하는 서로의 관점 차이가 있는 생각들을 발췌하여, 각색해 보았습니다.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것 같아요.


삶을 대하는 두 다른 유형에 대한이야기.


*영화 감상 후 나눈 내용 일부 발췌

<영화 :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삶의 이유에 대하여


INTP유형의 감상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는 게 득 되는 게 없다.

안 태어나는 게 이득인 것 같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가며

죽음과 질병 위험에 두려워해야 하고

살아있기 위해 계속 먹고 싸고 일해야 하는데

쾌락은 순간에 불과하며

쾌락을 해결해도 일시적일 뿐

다음 쾌락의 노예가 될 뿐.


결핍이 충족되는 순간은 행복하나

이내 허무함과 결핍이 찾아온다.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죽어야만 유지되는 생태계.


슬픔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오늘도 사슴은 사자에게 산채로 살을뜯긴다.

그 누구도 사슴을 도와주지 않는다.



ESFJ유형의 감상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있다.


살아야 함에 이유를 찾지 마라.

그저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다.


잠시 이 삶 약 100년이 안 되는 삶 속에서 인류는 억겁의 윤회를 돌아 삶을 이어간다.


삶이란 참 짧은 찰나에 가깝다.

허무함과 고독 결핍은 당연한 감정이며, 이러한 감정 또한 찰나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다는 생을 얻어간다.

중환자 병실에 남은 누군가의 삶이 신생아실에서 새로운 삶으로 잉태된다.


생의 찰나에 느끼는 감각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기쁨 슬픔 분노 사랑.

짧은 찰나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두 느끼고 소멸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있다.



INTP


기쁨과 사랑은 분명 가치 있고 행복한 감정이다.


그러한 순간의 행복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에 비해

감수해야 할 고통의 크기와

자유대신 감내할 속박의 크기가 너무 크다.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잠시 집에 와서 1시간 넷플릭스를 보는 것을

행복이라 느끼라고 강요하지 말라.


이미 태어난 자는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에 대한

논의이다.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베너타가 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이러한 논의가 쓰여있다.


이 논의는 이미 태어난 자에게 스스로 죽기를 종용하는논의가 아니다. 베너타교수가 주장하는 반출생주의의 핵심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옳은 일인가?'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ESFJ


행복은 상대적이다 하루 10시간 일하고 1시간 넷플릭스 보는 행복의 강도와 매일 24시간 넷플릭스를 보는 삶의 행복의 강도는 다르다.


누군가는 행복의 절대적 크기가 행복을 결정짓는다 하지만 실상은 행복의 기간과 크기가 아닌 고행에 비례한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새로이 태어나는 것들을 내가 막을 순 없다.

이 순간에도 새로운 생명은 무수히 저 별의 개수만큼 태어난다.


법정스님의 행복의 조건 중.



INTP


법정스님은 왜 산속에 들어가셨겠나

나 또한 그분을 존경한다.


그러나 자네 말대로 이미 태어나버린 우리는

긍정적으로 웃으며 살아가야지.


그것이 공리주의에도 부합하며 현명한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구나.



ESFJ


태어난 이유를 찾으면 끝도 없다.

행복의 의미는 나의 의미부여에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인생을 이어가 보자.




허무주의와 낙관주의

극단적 유형의 예시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은 어느 쪽에 가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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