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엘리아의 일기

엄마의 음식

by Elia

추수감사절 연휴 시작 전에 룸메이트 크리스의 부모님이 기숙사에 놀러 오셨다.

카놀라유 공장을 경영하는 분들이라 음식에 대한 흥미가 많으셨다.

내가 담근 김치와 비빔밥을 크리스틴 부모님께 만들어 드렸다.

되도록 자극적이지 않게....

일식, 중식 레스토랑은 이 외진 지역에도 있다. 하지만, 한국 음식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라 먹는 법을 설명해 드렸다.

일본 음식을 담는 그릇과 다른 점, 한국 음식이 갖는 특이한 점을 설명해 드리는 동안 내 눈동자를 맞추며 열심히 경청하셨다.


"이런 음식 처음 먹어보는구나. 엄마가 많이 보고 싶겠구나."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셨다.


기숙사 오븐으로 이 맛이 안 난다 하시며 집에서 만들어온 쉐퍼드 파이와 펌킨 푸딩을 주셨다.

내가 처음 먹어본 다른 나라 어머니의 첫 손요리였다.

쉐퍼드파이는 목동들이 양치기 할 때 먹었다는 음식이다. 고기와 각종 시즈닝으로 익힌 베이스 위에 포슬포슬한 메쉬드 포테이토를 얹어 구웠는데, 크리스틴의 어머니는 증조 할머니가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온 세대 였다 말씀 하셨다.

이 음식의 만드는 방밥도 할머니께 전수 받았다 하신다.

밭에서 키운 호박의 달콤한 맛이 조미료가 전혀 없는 재료 그 자체의 담백한 맛이었다.

shepherd’s pie



"우리 농장에서 키우고 생산한 카놀라유는 캐나다에서도 유명하단다."

소녀 같은 어머니의 미소가 햇살 담뿍 받아 웃는 유채꽃 같았다.

크리스틴 어머니께 나는 한국의 참기름을 작은 병에 담아 드렸다. 향이 좋다며 무척 좋아하셨다.


엄마의 맛.

자연이 주는 부드러운 감칠맛...

낯선 나라에서 엄마의 맛을 더듬더듬 찾아가기 시작했다.



기말이 끝나고 유학생들 모임은 계속되었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거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대부분 유학생들만 남았다.


"오늘 아침에 과사무실에 제출해야 할 서류가 있으니까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야간형 인간(Night person)이라는 히로에게서 아침 7시에 전화가 왔다.


" 걸어서 10분도 안되는데 괜찮아."

" 오늘 영하 35도야. 태워주고 싶어. 가는 길에 내려주는 건데 뭐... 30분 후 나와."


히로는 학교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언제부터인가 가끔 10분 거리를 태워주며 차 안에서 오늘 일정이나 어제 있었던 자질구래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짧은 시간의 수다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The vibrant Broadway area of Saskatoon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학생회관 게임센터에서 나오는 베이비 지나와 마주쳤다. 한국 유학생 중 막내둥이지만 키가 가장 크고 어른 같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였다. 특유의 귀여운 눈웃음으로 나를 꼭 안아주며 잠깐 카페에 가자고 할 말이 있단다.


"언니, 요즘 히로 차 타고 다녀? 며칠 전에 세실리아가 그러는 거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리가 히로 차 타고 다닌다고 한국 애들한테 그러는 거야. 내가 언니가 몸이 요즘 안 좋아서 그래했더니...

누군 좋겠네 하는 거야. 자긴 버스 통학하느라 힘들다고. 듣고 있던 올드 지나가 그럼 넌 진한테 태워 달래라! 했어. 옆에 있던 바비가 애들이 공부하러 외국까지 와서 연애만 하고 다닌다고.

(난장판이다)

그랬더니 타이완 애 있잖아. 이 남이 연애를 하던 결혼을 하던 신경 끄고 공부나하라고. 한국말도 모르면서....."


다이어트한다는 지나는 핫쵸코 주문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야. 사촌 언니네 집에서 밥 먹는데 세실리아가 진이랑 같이 온 거 있지? 진이 형부 논문 좀 도와주잖아. 언니가 잘 왔다면서 수저 하나 더 놓음 되지 했어. 그런데 세실리아가 히로 얘기를 진한테 계속 물어. 전 여자 친구 어땠냐고.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본인한테 물으면 되잖아. 이상해."


지나는 룸메이트랑 영화 보러 간다며 자리를 뜰 준비를 며 카페 문 앞에서 말을 이어갔다.

"언니. 세실리아랑 말 섞지 마...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세실리아는 이전 캘리포니아의 어학연수 동기를 만난다고 일주일간 LA로 떠났다고 했다.

총총걸음으로 가는 지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 있었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낮엔 병든 닭처럼 졸린데 밤엔 잠이 안 왔다.

기숙사 맨 위층의 코인 세탁룸을 올라갔다. 작은 휴게실이 연결되어 있는데 보드 게임을 하던 애들도 어느새 돌아갔다.

추수감사절이라 기숙사는 전보다 차분한 분위기다.

혼자서 TV로 드라마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 아니.. 이 시간에 뭐 하세요?"

진이 아이스크림 바를 하나 손에 들고 있었다.

"세탁 중. 잠이 안 와, 진은?"

"그냥 심심해서. 전화해도 안 받길래, 리네 방 문 앞에 세탁실 간다고 쓰여있길래. 끝났어?"

" 방금 왔어요."

"아! 그런가요."


진이 한국말로 반말하면 반말로, 존댓말로 하면 존댓말로 진지하게 대답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진, 세실리아 없어 심심하겠네?"

"어? 그냥. 여동생 같아. 근데 리는 히로랑은?"

"진이 요즘 도서관에 안 보이니까... 나랑 다니는 거야. 밥 같이 먹으러."


TV의 지역 뉴스가 전국 뉴스로 변했다.

아이스바 스틱을 입에 문체,

"리. 나 동전 좀. 하나 더 먹고 싶다."


한국인이지만 외형이 외국인 같은 외모의 진이 한국말을 하는 것은 가끔 신기했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온 진은 히로와 같은 바이오 전공이었다. 머리도 좋지만 노력파였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대부 같으면서도 친절하지만 공과사의 선을 분명히 긋는 사람, 진이었다.


나는 내 것까지 사 오라고 남은 동전을 다 주었다.

소파에 떨어져 앉아 아이스바를 먹으며 재미없는 TV를 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 히로는 어떤 사람이야?"

(이런 질문을 하는 나도 세실리아 같은 건가?)


진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TV를 보면서,

"히로는~섬세해. 착해. 재밌고. 조용하지만.... SF영화 좋아하고. 리가 더 잘 알잖아."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

"시간의 길이가 중요해?"

하품을 하며 진이 일어났다.

만남의 양보다 질이란 얘기인가?

약간은 어눌한 발음이지만 말할 때 진은 그냥 말을 뱉지 않았다.

항상...


"리. 나 자러 갈 거야. 빨래 끝? 밤에 혼자 여기 있음 위험해. 빨래는 밝을 때만 해."


기다려주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나를 찾은 이유를 물으니 오늘밤에 오로라 보인다니까 보라고 전화한 거 란다.


"고마워. 아이스바는 선물이다."

"What? 에이... 아이스크림 컵으로 뽑아올걸."

"잘 자!"


방에 돌아오자, 창밖엔 오로라가 천사의 치맛자락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로라의 공연이 시작됐다.

긴 연녹색 커튼이 너풀거리며 끝자락이 땅으로 떨어질 것 같다가도 보라와 핑크 섞인 짧은 실루엣이 녹색 빛을 삼키듯 끌어올린다. 춤을 추듯한 수직이 연속으로 등장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아름답다. 캄캄한 밤하늘이 색으로 물들어지는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처음 느끼는 사람에 대한 감정.

누구를 알아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번개 맞을 확률보다 복권 당첨될 확률이 더 낮단다.

나와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나는 것은 살면서 몇 퍼센트 확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