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8월에 도착했을 때 여름과 가을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반나로, 아침저녁으로 두툼한 재킷 차림이 캠퍼스 안에서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나를 돌봐야 했다.
침구세트, 가재도구, 그리고 작성해야 할 서류들.
어리둥절한 시간들이 조금씩 정리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9월부터 눈이라니...
캐나다 중부의 Saskatchewan.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언어로 '멈추지 않는 강'이란 뜻이다.
시내를 가르는 사스커툰 강(Saskatoon River )은 한국의 서울 집 앞에 보이던 한강을 연상시킨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온화한 표정의 주민들.
이곳 주립대학에서 음악 교육을 먼저 공부하기로 했다.
The University of Saskatchewan's main campus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주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인 유학생이 소수나마 있었다.
국제학생클럽에는 같은 한국 이름의 여학생이 네 명이다.
다행히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 이름 호명에 혼동하지 않았다.
나이가 제일 많은 '올드 지나', 제일 어린 '베이비 지나',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세실리아', 그리고 나는 그대로 '리'.
"넌 이름이 리야?"
"응, 그냥 성이야"
"정말? 그냥 그... 성씨 이름이네. 히로(広)! 네 가 아이디어 좀 내봐."
국제학생 모임 때 처음 만난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앉다 보니 어설픈 나의 닉네임이 화두가 되었다.
마른 체형에 얼굴이 하얗고 갈색 뿔테가 어울리는 일본인 남학생.
히로(広).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이곳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일본 사회가 적응이 안 되는 히로만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와 히로가 눈이 마주쳤다.
"리? 음... 리.. 리에? 너무 일본이름 같아.
에리.. 엘리... 엘리아? 어울리네!"
히로의 순간 작명이 끝났다.
내 옆에 앉았던 아키코(秋子)는, "오... 그런 닉네임 첨 들어. 뭔가 북유럽 느낌? 좋네! 엘리아!"
'엘리아'
유럽에서 온 이들은 나를 '엘라이어', 아시아계 친구들은 '에리아', 한국 사람들과 룸메이트들은 그냥 '리'로, 교수님은 한국 이름 전부를 불러 주었다.
나는 한 명인데 나를 불러 주는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나' 라는 이름 한 봉지에 미묘하게 다르지만 색깔은 여러 가지로 섞인 맛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이름들이다.
Canadian candies
" 굿모닝! 여러분 준비하세요! 내일은 영하 30도랍니다. 기분은 알로하?!"
아침 6시 알람 라디오에서 DJ가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 맞는 겨울이였다.
영하 30도에 눈바람(flurry)이 내려치기 시작하면 몇 보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몇 분 걸어 나가면 눈썹과 속눈썹이 하얗게 살얼음이 낀다.
도서실엔 자기 차로 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숙사에서 십여분 남짓 거리가 몇 시간 걸린 듯했다. 겨우 도착한 도서실 구석의 통창문 옆 큰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얼어붙은 속눈썹도 녹고 겨우 숨을 돌려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저기... 여기 비어 있어? 앉아도 돼?"
히로(広)였다.
흔한 '안녕(Hi)!'도 없었다.
내가 누군지는 아는 걸까?
어느새 눈이 멎었나 보다.
통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어 테이블이 따뜻해졌다.
밖에 눈은 안 쌓였지만, 여전히 매서운 칼바람에 남은 눈가루가 대기 중에서 햇살에 반사되었다.
반짝인다. 공기가 반짝거린다.
"공부 언제까지 할 거야? 커피 마시러 갈래?"
조용한 도서관의 공기에 부드러운 히로의 목소리가 퍼져갔다.
사실 커피보다는 배가 고팠다.
"점심은?"
내가 되물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히로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저녁부터 안 먹었다... 하하하."
환하게 웃는 얼굴이 그의 하얀 셔츠처럼 눈부셨다.
그 후로 종종 히로와 도서관 점심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