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엘리아의 일기

마음이 고프다

by Elia

봄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지나의 사촌 언니 집에 놀러 갔다.

냉장고에 A4용지에 빽빽이 손글씨로 한국 음식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걸 다 만들어요?"

내가 묻자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다.

"아니다. 내 묵고 싶은 거 기냥 적어 놓은기다. 신랑.. 학교 감 심심도 하고 해서..."

한국 음식의 재료가 에드먼턴이나 가야 살 수 있던 때라 언니는 상상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간호학과 나와 모교 병원에서 근무하고 공부는 더 이상 하기도 싫다고 했다.

아이가 아직 없어 하루가 무료하지만 한국음식을 만들어 놓고 형부가 연구가 끝나고 집에 오기만을 기다린단다.


언니가 차려준 귀한 떡볶이를 먹고 감사 인사를 하고 지나와 걸었다.

점점 봄기운이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지나가 한숨 쉬며 말했다.


"저러다... 형부가 학위 따고 성공해 다른... 에이 아니다."

"무슨 얘기야?"

"...... 언니가 너무 외로운지... 형부만 내조하니까. 한국에선 안 먹던 미니 초코바를 매일 한 봉지나 먹었데. 지금 많이 살 빠진 거야.

이모가 여기 와서 보니까 혼자 울면서 초콜릿을 먹고 있더래."

"아이 생기면..."

"형부 공부 방해 될까 피임한다고..."


이모는 걱정이 되 한국 돌아가기 전에 자주 언니한테 들르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래서 가끔 한국 유학생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음식을 잘 만드는 사촌언니의 야무진 손이 생각났다. 집안 구석구석 손으로 만든 핸드메이드 소품들.. 꽃모양으로 만든 당근이 든 떡볶이.


언니는 그러면서도 외로운 거였다.

마음이 배고픈 거다.



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엄마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전화로 해도 되는데...

편지 내용이 전화로 하기엔 '엄마가 미안해'란 글로 시작된 편지.

네가 유학 가고 일 년쯤 되어 갈 때 아빠의 사업체가 어렵게 되었단다. 너에게 알려주는 편이 나을 듯싶어서.
한국에 돌아오면 안 될까?
네가 하고 싶은 공부 한국에서 많이 했잖니.
더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부모 욕심이 따라가 주질 못하는구나...

외국 유학생활은 내 힘으로 모든 걸 하기에 사실 한도가 있었다.

장학금을 타도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내 힘이 점점 밑바닥이 보이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중도하차.

선택 후 후회 없을까..

지금까지 '실패'라는 단어를 삼켜보지 못한 내게 이건 너무나 뜨겁고 무거운 쇳덩이 같다.

그래...

내 욕심은 여기까지만 부리자.


어디부터 정리해야 하지?

순간 히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친구 내가 없어도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닐까?' 하는 생각...

생각이 복잡하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방은 불이 꺼진 채 저녁 시간을 넘겼다.

똑. 똑. 똑.

"리. 히로가 왔는데?"

룸메이트 베키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자는 척할까? 아무도 만나기가 싫었다.

"자나? 히로, 어떡하지? 리가 대답을 안 하네"

"그럼... 말이야. 나중에.."

다들린다.

그대들의 대화가...


문을 열자 둘 다 깜짝 놀랐다.

"어디 아파?"

잠깐 잠이 들었었다고 둘러댔다.

히로는 베키가 자리를 떠나자,

"무슨 일 있어? 세실리아가 뭐라 했어?"

얘가 그건 어떻게 알았지?

이 넓은 외국에서, 유학생 모임에서, 나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났는지 관심도 무뎌진 지 오래였다.


"아니. 만난 적도 없어. 밖에 나갈까?"


히로가 저녁은 먹었냐 물었다. 차의 시동을 걸며 오늘은 특별한 것을 먹으러 가잔다.

도착한 곳은 히로의 아파트였다.

히로는 자기 집에서 우동을 먹자고 하며 차의 시동을 껐다.


(우동? 한국에선 라면 먹고 갈래요?인데...)


히로의 아파트는 꽤 넓었다. 이곳에 엔지니어 강의하러 온 일본인 조교수가 귀국하기 전, 자기가 살던 조용한 아파트가 있는데 생각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 해서 이사한 거란다. 전에 있던 아파트는 소음이 심해 밤에 잠을 못 잤단다.

우동을 만드는 동안 거실을 구경을 했다.

레드와 블루의 색감이 강렬한 여인의 누드 유화들과 노란색과 흰 꽃을 그린 커다란 정물화가 벽에 기대어 있었.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로우테이블, 그리고 블릭과 판넬로 만든 오디오 거치대 그리고, TV가 전부였다.

오렌지 칼라의 카펫 위엔 전공 서적이 몇 권 놓인 채...

마티스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히로가 우동을 만들어 로우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미역과 파, 계란. 맛있었다. 아무것도 못 멋을 것 같았는데 히로가 만든 우동을 다 먹었다.

미역과 파는 극상의 조합이지만 우동에 자주 올려진다

후식 이라며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이거.. 비싼 건데."


내가 중얼거렸다. 배가 부르니 말을 하게 만들었다.

히로는 맞아 맞아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들었어? 세실리아 얘기?"

내가 물었다.


히로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따뜻한 물을 마시다 미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뜨거...

그거 올드 지나가 일본애들한테 얘기해 나도 전해 들어 알았어.

언젠가 세실리아, 진, 나 셋만 레스토랑 간 적이 있었어. 밖에 잠깐 주차 코인 때문에 나왔는데 세실리아가 나와서 일본말로 여자친구 있냐고 묻더라. 내가 일본말로 지금 '진행 중'이라고 대답했어. 그때 짐작은 했다. 질문이 어떤 의도인지.

지나 말로는 한국애들 사이에서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던데, 아키코도 들었데.

엘리아는 신경 안 써도 돼.

되도록 세실리아랑 둘이서만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가쉽거리가 됐구나.

이러려고 나이 먹고 캐나다까지 온 게 아닌데.

집에 돌아가자.

어차피 공부도 끝내지 못할 것 같고..'

힘들게 준비해 왔던 미래의 계획이 없던 방향으로 곤두박질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무 말도 못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이스크림이 반은 녹아버렸다.

히로는 안절부절못하며 티슈박스를 찾아내어 내 얼굴을 닦아주며,

"에헤이.. 비싼 아이스크림 가 녹았네. 아까 버라."

히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있는 기간 동안 웃고 떠나자.


내가 히로에게 말했다.

"2차로 팀호튼 가자."


무겁다.. 너무 무거워.

잠깐 무거운 마음은 내려놓고 조금만 쉬게 하자.

쓴 맛이 많이 피곤할 때는 달게 느껴진다고 한다.

지금은 당이 당긴다.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밤....

봄바람이 포근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