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향하는 곳
여름 방학 들어가기 전 교수님께 한국에 돌아가야만 하는 사정을 전했다.
아빠가 신세 진 분들께 드리라는 홍삼차를 교수님께 드리자, 한국 학생은 처음이라 아쉬워하셨다.
언젠가 다시 만나 음악에 대해 서로의 나라에 이야기하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여름 방학이 시작 됐을 때 소포 하나가 기숙사로 배달되어 왔다.
「The Enjoyment of Music」
학부 때 번역서로 썼던 교과서의 원서였다.
교수님의 손길이 묻어 있던 책 안에 눈에 익은 편지가 있었다.
오늘 새벽 네가 준 한국차를 음미해 보았어.
깊은 자연을 맛보았단다.
음악은 항상 너와 함께한단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기의 어려움을 나는 항상 느낀다.
이곳에 있었던 시간이 인생에 한 페이지가 되길 바라며...
당신의 친구로부터
아름답게 나이 드신 분이다.
Age gracefully.
히로에게도 한국 사정과 나의 입장을 말했다. 히로는 가만히 듣고, 입을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올해 안에 돌아가. 히로는 졸업하면 어떻게 할꺼야?"
나의 질문에 히로는,
" 엘리아가 중간에 이렇게 한국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변하는 거야?"
" 당장은 달라지지 않지만 내가 여기서 공부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거야."
히로는 눈을 감은채 팔짱을 끼고 말했다.
" 음... 글쎄. 나는 엘리아가 원하는 데로 결정하길 바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 그래. 한국에선 맏딸에 대한 기대가 특이하다고 할까?"
히로가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기 전까지 같이 여행 가자. " 말했다.
공부해라, 좋은 대학 나와라, 능력 있는 사람 돼라, 이래라저래라 부모님은 한 번도 지시한 적은 없었다.
내가 나에게 너는 그렇게 해야 너를 이기는 거야라고 경쟁했는지도 모른다.
맏이니까 동생에게 모범이 되는 누나,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로 엄마에겐 엄마가 이루지 못한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역할...
맏딸이니까.
맏이니까.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나를 길들이고 있었으니까...
학교 사무실로 가는 아침에 기숙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을 만났다.
" 어디가?"
" 응. 도서관. 오늘은 히로 안 만나?"
" 아침에 전화 없길래. 자나 봐"
같은 방향인 학교로 향했다.
한국 언제 돌아가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반쯤 걸어왔을까..
진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걷던 진이 길바닥에 쪼그린 채 주저앉아 버렸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힘들어한다.
숨을 쉬는 모습, 숨소리가 이상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입술이 파래졌다.
" 진? 왜 그래?"
" 잠깐만... 조금만 쉬었다."
길 한 중간이라 일단 앉을 곳을 찾았다. 잔디밭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있어 일단은 그곳으로 진을 부축했다.
어떻게 할지를 모르니 등을 마사지하듯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켰다.
잠시 동안 상태를 살펴보니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 혹시 먹는 약 있어? 도미토리로 돌아갈래?'
항상 의젓한 큰형 같은 진이 힘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진의 가방까지 짊어지고 진의 한쪽 팔을 내 어깨에 올렸다.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걸음은 처음이다.
겨우 진의 방에 그를 옮기고 침대에 눕혔다.
히로에게 전화해도 안 받는다.
" 진, 약은?"
" 아침에 먹었어. 괜찮아. "
" 구급차 부를까?"
" 아니... 이러다 쉬면 돼"
" 세실리아, 불러줘?"
" 갠 몰라.. 나 아픈 거. 오늘 약속 있다고.."
어느새 진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입술 색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걱정은 되는데 약기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지켜보다가, 침대 옆 테이블에 물 한잔과 메모를 남겼다.
나중에 꼭 연락바람.
(연락 안 오면 사망한 걸로 알겠음)
From. 리
진의 방은 내 방 구조와 같았다.
침대 옆 테이블.
문 입구에 작은 세면대와 케비넷. 그리고 벽장.
책꽂이에는 책이 잔뜩, 그 옆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 황금털을 반짝이고 있다. 진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특이한 개 모양의 인형이네 생각하며 방을 조용히 나왔다.
' 어디가 아픈 걸까?'
초등학교 때 심장이 안 좋아 수술했던 남자아이가 생각났다. 체육시간에 갑자기 쓰러진 그 아이.
아이들이 너무 놀라 담임의 얼굴을 쳐다봤던 기억.
그 아이는 수술과 퇴원을 마치고 6학년이 돼서야 같은 반이 돼, 급우들 모두 신기해했으니까..
말도 그다지 한 적 없지만 아프지 않기를 마음으로 기도한 적이 있었다.
세실리아가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알겠지...
대학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에 히로에서 전화가 왔다.
진의 이야기를 했더니 알겠다며 너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다음 주 같이 가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누구인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께."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진에게서는 그날 전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