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있으면 행복할까? 함께 가정을 일군 동지로 30년을 함께한 부부가 마음만 있으면 행복이 유지될까? 그렇지 않다. 경제적 가치 증명이 함께 따라야 서로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진다. 안정된 부부관계가 유지될 확률이 높아진다. 경제적 인정이 없거나 거부당하면 100세 시대에 나머지 50년이 어두워진다. 관계는 삐걱거리기 쉽다. 노선 변경 확률도 높아진다.
중년이 되면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자녀는 자신의 길을 탐색하느라 품을 떠나 바쁘다. 동물의 세계가 그렇듯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다. 부부만 남는다. 남겨진 시간은 나를 돌아보는 여유를 준다. 사실 그 여유가 거친 감정을 몰고 오는 기회가 된다.
가사와 아이들 케어에 집중하던 부인은 그제야 먼지 쌓인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 내 이름으로 난 무엇을 했는가, 나는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억울함과 후회가 범벅된다. 뭔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원망이 과거의 기억을 잡아당긴다. 내 이름 석자는 소홀했구나 싶어, 흘러버린 세월이 서러워진다. 탓하기 시작한다.
‘그때 이랬더라면, 그때 그 사람이 나를 꼬드기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러고 있지는 않을 텐데’ 의미 없는 생각으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한다. 이 강한 부정적 감정에 매몰되면 인생이 회의적으로 변한다. 과거의 수렁에 깊게 빠진다. 부정이 드리운 마음에는 밝은 빛이 끼어들지 못한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암묵적 책임에 순응했던 위치가 남편이다.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고생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아부도 마다하지 않았고, 하기 싫은 일도 무조건 했다. 선택이 아닌 생존이라 생각했다. 내가 벌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에 위협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벌었기에 이 가정이 온전히 버텨올 수 있었다 믿는다. 그래서 그 권위와 존엄은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가족이 끝까지 인정해 줄 줄 알았다. 내 생각과 다름을 발견하는 때가 온다. 존엄은커녕 존중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후회와 서운함이 밀려든다. 가족을 탓한다. 특히 부인을 탓하기 쉽다. 존엄을 강요하면 가정은 냉기로 채워진다. 가족 구성원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존엄은 가족이 내게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우치지 못하면 점점 불행해진다. 계속 강요하면 할수록 소통은 멀어지고 소란은 잦아진다. 주변에 머무는 사람이 없이 진다. 그리고 외로움이 머문다.
부부는 공생관계다. 서로 응원하며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를 건강하게 가꾸기로 약속한 관계가 부부다. 그런데 왜 중년에 서로 외딴섬을 향하는 것일까.
서로의 인정이 부족해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거다. 자녀양육을 포함한 가정 일굼의 거친 바람을 이겨내고 나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정신이 번쩍 들 때 있다. 나라는 존재, 내 이름 석자가 초라하게 남겨짐을 느낄 때가 그중에 하나다. 특히 가족의 인정이 없다면 빈 공허함은 더 크다. 지금까지 달려온 삶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인정은 말과 마음만이 전부가 아니다. 물질적인 인정도 함께 따라야 한다. 부부의 재산이 한 명에게 치우쳐 있다면 명의를 옮겨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공허함이 느껴지는 중년기에 경제적 가치를 채우는 명분이 믿음이라는 역할을 한다. 공생관계의 건강한 성장과도 같다.
헤어지면 반반이라는 법적 이유를 핑계로 명의 이전을 거부하는 부부가 많다. 묻고 싶다. 진심으로 반반을 인정하는 처세를 하고 있는지를. 틀어쥐고 있는 것이 주도권을 쥐는 거라 생각한 내면의 옹졸한 수단은 아닌지를.
법적 핑계가 길어지면 결국 반반을 선택하는 결정을 한쪽이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 이혼이다. 묻고 싶다. 진심으로 그 상황이 원하던 그림이었는지를.
많은 중년부부의 고질적 다툼의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명의의 한쪽 치우침이다.
서로에 대한 인정이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자산이다. 마음의 인정, 그리고 경제적 가치의 인정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진정한 공생관계다.